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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교학

 

  • [창가학회의 역사] -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 시대

  • 관리자

  •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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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 창가학회의 역사

여기서는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오신 삼대(三代) 회장의 발자취와 사제정신을 통해 창가학회의 역사를 배우겠습니다.

법화경은 불의(佛意-석존이 가르침을 설한 참뜻)를 밝힌 경전입니다. 불의는 만인이 자신의 생명에 본디 갖춰진 부처의 지혜를 나타내고, 자타 함께 확고한 행복과 평화로운 세계를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이 불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장애와 싸워 자타의 생명을 변혁하는 것이 진실한 대승보살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 보살이 석존 멸후 말법에 출현하여 전 세계에 법화경을 넓히고 불의를 실현한다, 이른바 광선유포한다는 것을 설합니다. 그 사명을 짊어진 보살이 바로 ‘지용보살(地涌菩薩)’입니다. 
이 지용보살의 상수(上首)인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사명을 자각하고 법화경에서 밝힌 광선유포의 불의불칙(佛意佛勅)을 자신의 대원(大願)으로 삼아 그 실현을 위해 일어서 말법의 중생과 시대를 구제하는 근본법과 실천을 확립하신 말법의 어본불이 니치렌 대성인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대성인의 정신을 계승해 세계 광선유포의 사명을 깊이 자각하여 그 실현을 위해 진지한 실천을 관철한 교단이 창가학회입니다. 또 현대에 광선유포의 자각과 실천을 확립한 지도자가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초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제2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제3대 회장(현 SGI 회장)에 이르는 ‘삼대 회장’입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 시대

창가학회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과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사제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모두 교육자였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1871년 6월 6일,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아라하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소년기에 홋카이도로 건너가 일하면서 독서와 학업에 힘써 홋카이도 사범학교(지금의 홋카이도 교육대학교)에 입학해, 졸업 후에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교사생활을 한 뒤 상경해 1903년에 최초의 저서인 ≪인생지리학(人生地理學)≫을 발간했습니다. 그 뒤 도쿄 각지의 소학교(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한편, 도다 선생님은 1900년 2월 11일, 이시카와현 가가시 시오야마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02년 무렵에 일가가 홋카이도 아쓰타군 아쓰타무라(현 이시카리시 아쓰타구)로 이주해 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일하면서 독학으로 교사자격을 취득해 유바리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사제의 만남 

그 무렵 진지하게 인생의 스승을 찾던 도다 선생님은 도쿄에 왔을 때 이미 소학교 교장으로 활약하던 마키구치 선생님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았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마흔여덟살이고 도다 조세이 선생님은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이윽고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 슬하에서 교사로 일을 시작해 스승으로 정한 마키구치 선생님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습니다. <상경 후 주경야독으로 가이세이예비학교, 주오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창가교육학회 창립
마키구치 선생님은 자신이 교육자로서 초등교육 현장에 종사하면서 모든 어린이가 스스로 행복한 사회인으로 자립할 수 있기를 바라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교육의 확립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교육학을 구상하여 그 토대가 되는 가치론을 깊이 추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간이 사회 속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확고한 주체가 될 수 있는 생명변혁의 원리와 그를 위한 근본적인 실천방안을 밝힌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만나, 1928년 대성인 불법을 계승한 닛코 상인(日興上人)의 흐름을 이어받은 일련정종(日蓮正宗)에 입신하셨습니다. 쉰일곱살 때였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입신 당시의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희로 거의 60년에 이르는 생활법을 일신했다.’고 술회했듯이 대성인 불법을 ‘생활법’으로 받아들여 사회생활 속에서 실증을 나타낼 수 있는 가치창조의 원천이 되는 종교로 생각하고 귀의했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법화경을 만나 믿어보니 우리 일상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과학과 철학의 원리로서 하등의 모순이 없다.’고도 입신 동기를 말했습니다.
또한 도다 선생님도 마키구치 선생님을 따라 그해에 대성인 불법에 귀의합니다.
1930년 11월 18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은 마키구치 선생님이 구상하신 교육학을 체계화한 내용으로 총 12권을 간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총 4권 간행)
제자인 도다 선생님이 사재를 털어 출판을 돕고 또 마키구치 선생님의 교육이론 메모를 순서를 정해 구상하고 문장을 정리하는 등 전면적으로 협력했습니다.
또 ≪창가교육학체계≫ 판권에는 저자인 마키구치 선생님, 발행 겸 인쇄인인 도다 선생님의 이름과 함께 발행처로 창가학회의 전신인 ‘창가교육학회’ 명칭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창가교육학회의 이름이 세상에 나온 최초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발간한 11월 18일을 창가학회 창립기념일로 정했습니다.
‘창가(創價)’는 ‘가치창조(價値創造)’라는 뜻입니다. 교육의 목적과 인생의 목적은 행복의 추구에 있으며 그 내실은 가치창조에 있다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사상이 담긴 말입니다.
이 ‘창가’라는 말 자체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이 나눈 사제의 대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가학회는 그 출발부터 ‘사제일체(師弟一體)’의 혼의 결정(結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 직결의 불법을 실천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사제 두 사람으로 출발한 창가교육학회는 차츰 기구(機構)도 정비되어 거듭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창가교육학설에 공감하는 교육자들의 단체로 출발했지만, 드디어 교육자 이외의 사람들도 참여하게 되어 가치창조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가교육학회는 일련정종의 재가신도 단체였지만 종래의 강(講-승려의 지도 아래 말사에 소속된 신도 단체)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했습니다.
마키구치 회장과 도다 이사장을 중심으로 학회 운영도, 회원의 신심지도도 승려에 의존하지 않고 학회 독자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학회는 처음부터 종래의 일련정종 종문의 틀을 넘어선 독자적인 재가단체였습니다.
또 그 실천에서도 불법을 사찰이나 장례식 등의 의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신행(信行)의 심화(深化)로 각자가 현실의 인생에서 행복을 실현하고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하는 ‘개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본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실천 방법에 기준을 둔 것입니다.
좌담회와 지방지도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창가교육학회는 순조롭게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당시 전국의 회원은 약 3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군국주의와 투쟁

그러나 ‘국가신도(國家神道)’를 정신적 지주로 섬기며 전쟁 확대로 폭주하는 군부정부는 국내의 사상통제를 강화하고 학회의 좌담회 등도 사상범 적발을 주임무로 하는 특고(특별고등경찰)의 감시 속에서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신사참배와 신찰(神札)을 모시도록 국민에게 강요했습니다. 1943년 6월, 학회는 권력의 탄압을 두려워한 일련정종으로부터 법주의 입회 아래 신찰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이런 일련정종의 태도는 니치렌 대성인, 닛코 상인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방법(謗法-정법<正法>을 비방하는 것)을 용인하는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마키구치 선생님은 신찰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학회는 니치렌 대성인이 밝히신 방범엄계(謗法嚴誡)의 가르침을 관철했습니다.
그해 7월 6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방절복을 위해 방문한 이즈 시모다에서, 도다 선생님은 도쿄에서 특고형사에게 연행되어 최종적으로 간부 21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가 그 이유였습니다.
혹독한 취조에도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은 끝까지 퇴전하지 않고 신앙을 관철하셨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취조를 담당한 검사와 판사에게도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교의(敎義)를 설했습니다.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불법의 정의를 관철하신 것입니다.
1944년 11월 18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연로하신 데다 영양실조까지 겹쳐 도쿄구치소에서 서거하셨습니다. 기이하게도 ‘창립기념일’과 같은 날, 향년 73세로 순교하셨습니다. 그 생애는 실로 어서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실천을 관철하고 니치렌 대성인의 민중구제와 묘법홍통(妙法弘通)의 정신을 현대에 소생시킨 존귀한 선구자의 일생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의 옥중 오달

도다 선생님은 1944년 연초부터 옥중에서 창제에 면려하는 한편, 법화경을 읽고 사색을 거듭하는 가운데 ‘부처는 생명’이라는 오달(悟達)을 득했습니다.
또 도다 선생님은 창제와 사색을 거듭하는 속에 자신이 바로 법화경에서 설하는 허공회의식(虛空會儀式)에서 석존 멸후에 법화경을 광선유포할 사명을 의탁받은 지용보살임을 깨닫고 ‘나는 지용보살’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1944년 11월의 일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이 ‘옥중 오달’로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 대한 부동의 확신과 더불어 광선유포를 자신의 사명으로 자각했습니다.
또 도다 선생님의 이 같은 ‘옥중 오달’이 바로 불법을 현대에 생생하게 되살리고 창가학회가 광선유포의 교단으로 비약하는 원점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을 추모하는 법요(法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광대무변한 자비는 저를 감옥에까지 데려가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재재제불토(在在諸佛土) 상여사구생(常與師俱生)’이라고 묘호렌게쿄의 한 구절을 몸으로 읽고, 그 공덕으로 지용보살의 본사(本事)를 알고 법화경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신독(身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재재제불토 상여사구생’은 법화경 화성유품 제7에 나오는 경문으로 ‘스승과 제자는 모든 불국토에서 언제나 함께 태어나 민중구제를 위해 투쟁한다’는 사제의 유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탄압에 굴복해 많은 사람이 퇴전하는 가운데, 마키구치 선생님에 대한 보은감사의 정성을 다한 도다 선생님의 말씀에서 사제의 깊은 유대를 배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