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I 한국SGI는 불법(佛法)의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고
평화·문화·교육운동과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SGI의 과거와 현재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 나아가
세계 192개국·지역 1,200만여 명의 회원이 실천하고 활동하는 세계종교로
도약하였습니다.

생로병사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 석존(釋尊)은 기원 전 5세기, 히말라야 산기슭(현재 네팔)의 작은 도시인 카필라바스투에서 석가족의 슈도다나왕(정반왕)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석가모니'라고도 알려져 있는 석존은 석가족의 존자(尊者)라는 뜻입니다. 스물 아홉 살 때, 인생의 무상(無常)과 괴로움을 통감하여,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했습 니다. 6년 동안 철저히 고행(苦行)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과도한 고행을 버리고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서른 다섯 살 때,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나 불타(佛陀)가 됩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주서이기》를 바탕으로 석존 입멸연도를 기원전 949년설과, 열 아홉 살 때 출가해 서른 살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이 일반적)
  • 인생의 교육자, 인간 지도의 달인으로서 민중을 교화 석존은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처지와 능력 그리고 성격에 맞게 자신의 깨달음을 설했습니다. 또 석존은, 엄격한 신분제도사회인 고대 인도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천한 사람은 없으며, 태어난 신분으로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동에 따라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된다. 《수파니파타》"고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여든 살 석존의 마지막 여행 - 전도(傳道)를 위해 걸은 350킬로미터 석존은 홍교를 하기 위해 갠지스강 유역의 마을을 중심으로 몇백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여든 살이 된 석존은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설법(說法)을 하던 왕사성(王舍城:라자그리하)에서 고향인 카필라바스투를 향해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하면서 각 도시와 마을을 방문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가르침을 설했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 여정은 35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합니다.

    석존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수행승들이여, 여러분에게 고합니다. 모든 일은 과거사가 됩니다.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수행을 완성합시다." 《대파리닛바나경》
    석존의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승 석존이 활약한 당시, 인도에서는 성전(聖典)을 문자로 남기지 않고 중요한 가르침을 암송하여 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석존의 가르침도 출가수행자 사이에서 암송하여 전승되었습니다.

    현재 학문연구의 성과에 따르면, 전승되는 과정에서 표현이 변화하거나 내용이 정리되면서 다양한 해석이 추가되었습니다. 석존의 사상적 가르침은 '경(經)'으로 정리되고 교단의 규칙은 '율(律)'로서 정리되었습니다.
지의(智顗 : 538~597년) 지의는 중국 천태종의 사실상 개조(開祖)로, 천태산에 살아서 천태대사(天台大師)라고 불립니다. 또, 지자대사(智者大師)라는 이름도 받았습니다. 열여덟살에 출가해 스물세살에 혜사(慧思:남악대사<南岳大師>, 515~577년)의 제자가 됩니다. '법화경'을 바탕으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득해, 진나라와 수나라 시대에 활약했습니다. 지의의 강의는 천태삼대부인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마하지관(摩訶止觀)》 등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지의의 교설(敎說)은 중국과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 《천태삼대부》에서 '법화경'의 깊은 뜻을 밝히다 《천태삼대부》는 지의의 대표작으로, 제자인 관정(灌頂:장안대사<章安大師>)이 기록했습니다. 《법화현의》는 '법화경'의 제명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를 해석하여, '법화경'이 석존의 가르침을 완전히 밝힌 것이라고 나타낸 책입니다. 《법화문구》는 '법화경' 28품의 경문에 해석을 첨부한 책이며, 《마하지관》은 '법화경'의 근본의(根本義)인 제법실상(諸法實相)과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을 나타내, 이를 바탕으로 하는 수행방법을 밝혔습니다. 이 삼대부에 지의의 중심사상이 밝혀져 있다고 전해집니다.
    '일념삼천'의 법문으로 '법화경'이 설한 일체중생 성불의 가르침을 체계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문은 우리가 느끼는 매 순간의 마음(일념)에 모든 현상과 작용을 의미하는 삼천(三千)의 제법(諸法)이 갖추어져 있음을 설한 법리(法理)입니다. '삼천'은 십계호구(十界互具:열 가지 경계(境界)에 각각 열 가지 경계가 갖춰져 있다는 뜻)와 십여시(十如是) 그리고 삼세간(三世間)을 곱한 것(백계×십여시×삼세간=삼천)입니다. 십계와 십여시 그리고 삼세간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마음을 파악한 법리를 종합해서 우리 마음의 전체상을 나타냈습니다.
  • 법화경을 최고의 가르침으로 정하다 니치렌(日蓮:1222~1282) 대성인은 아와지방(현재 지바현 남부)의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아와지방의 세이초사에 들어가, 도젠보를 스승으로 섬기고 열여섯 살 때 출가합니다. 10년 동안 가마쿠라, 교토, 나라 등지에서 수학하고, 동아시아에 전해진 석존의 교설(敎說)이 담긴 여러 경전 중에 '법화경'이 불의(佛意)를 밝힌 최고의 경전이라고 정했습니다.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를 신앙의 근본으로 삼다 서른 두 살 때인 1253년 4월 28일 고향인 아와지방에서 '법화경'의 핵심인 '모든 부처의 인(因:수행)과 과(果:깨달음의 경지)를 갖춘 근원의 일법(一法)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중생구제를 위한 최고의 법으로 넓히겠노라고 선언합니다. '남묘호렌게쿄'의 창제를 신앙의 근본으로 삼은 것은 불교역사상 처음입니다.
  • 대지진을 직접 경험하고 민중구제를 위해 일어서다 1257년 8월, 대지진이 일어나 가마쿠라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 지진을 직접 경험하고, 눈앞에 보이는 참혹한 현실에서 민중을 구제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1260년 7월 16일, 당시 최고권력자인 호조 도키요리에게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제출합니다. 니치렌은 《입정안국론》에서 '법화경'의 만인성불 사상을 경시하는 정신적 풍토를 엄하게 규탄하고, 민중을 괴롭히는 사상적·종교적 혼란을 변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후, 권력자 및 그들과 결탁한 승려들이 니치렌을 계속 탄압했습니다.
    법화경을 신독(身讀)하고 '법화경 행자'라고 칭하다 '법화경'에는 "이 경을 포교하면 극심한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반복해서 씌어 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 박해를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법화경'을 몸으로 읽은 실천자라고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법화경 행자'라고 칭합니다. 서른 아홉 살 부터 쉰 살까지 11년 동안, 목숨까지 위협받는 대난을 네 차례 겪습니다.
    '다쓰노구치법난'을 계기로 신앙의 대상인 본존(本尊)을 도현하다 1271년 9월 12일, 니치렌 대성인은 생애 최대의 법난(法難)인 '다쓰노구치법난'을 겪지만, 참수를 면하고 사도에 유배됩니다. 이 법난을 계기로 '법화경'의 허공회의식(虛空會儀式)을 사용해 본존(本尊:문자 만다라)을 도현합니다. 사도유배 때 저술한 《개목초(開目抄)》에서 말법의 정사(正師)로서의 자각을 표명하고,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본존의 의의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만년에 9년 동안 미노부(야마나시현)에서 지내며 《선시초(撰時抄)》와 《보은초(報恩抄)》 등을 저술하고, 문하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 지도·육성했습니다.
창가학회 창립과 전세계로 넓혀진 불교 사상 1930년 11월 18일,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과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이 창립한 창가학회는 도다 선생님 슬하에서 훈도를 받은 제3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이 취임하며 크게 발전해 세계 192개국·지역에서 1,200만 여 명의 회원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신봉하는 SGI(국제창가학회)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로써 인도와 중국, 한국을 거쳐 일본에서 꽃피운 불교의 법화사상은 다시 전세계로 넓혀져 세계인이 함께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수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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