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서비스 한국SGI는 불법(佛法)의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고 평화·문화·교육운동과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알고싶어요

  • 근행, 창제할 때 정좌하지 않으면 안되는건가요? 금방 다리가 저려 기원할 수 없어요

    • 의자를 사용해도 좋고 정좌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착실하게 부처님을 대해 가자’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즐겁고 기분 좋게 근행·창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양쪽을 생각하면서 아무튼 지속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형식에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형식일 뿐 반드시 근행할 때 무릎을 꿇고 정좌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의자를 사용해도 좋고 다리가 아픈 사람은 양반다리나 옆으로 포개 앉아도 상관없습니다. 무리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본래 풍요로운 마음으로 행해야 할 근행·창제가 오히려 고통이 되고 만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자세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본존님을 배알하는 것이 중요하며 괜히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불법(佛法)에는‘수방비니(隨方毘尼)’라는 말이 있다. 불법의 본의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각국·각지역의 풍속·습관이나 시대 풍습에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는 습관이 없는 나라·지역에서는 반드시 무릎을 꿇는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입회원 Q&A)
  • 근행 하는 도중에 눈을 감으면 안 되는 건가요?

    • 눈은 분명하게 뜨고 어본존을 똑바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차원은 다르지만 이전에 영국 귀족의 자제들은 어릴적 부터‘상대방의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물며 근행·창제는 어본존과 마주하는 것이므로 눈을 감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눈을 감으면 어본존과 감응이 약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눈이 부자유한 사람은 어본존을 마음에 떠올리고 하면 됩니다.(청춘대화1.제20회 근행창제란(하))
  • 눈의 위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자연스럽게 하면 됩니다.

      중앙의 남묘호렌게쿄라는 문자의 주변을 보면서 해도 좋고 전체를 보면서 해도 좋다. 진지한 신심이 있으면 전부 통합니다.(청춘대화1.제20회 근행창제란(하))
      대부분‘묘(妙)’자를 보고 합니다.
  • 십여시를 세 번. 제목을 세 번 부르는 이유는?

    • <십여시>

      방편품의 ‘소위제법, 여시상, 여시성 … 여시본말구경등’이라고 세 번 반복해 읽는 부분을 ‘십여시’라고 합니다.
      ‘여시’란 간략하게 말하면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물의 진실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 움직임을 열 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설하고 있는 것이 ‘십여시’입니다.
      그런데, 십여시를 세 번 반복해 읽는 이유를 니치렌 대성인은 「세 번 읽으면 공덕이 뛰어나다)」(어서 412쪽)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것에 대해 이케다 SGI회장은 “‘내 몸이 존귀한 부처이다’라고 선언하고 신심의 공덕을 더하기 위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 읽는 이유는 깊은 법리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단적인 예로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부처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현실 속 부처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당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측면을 기리기 위해 ‘십여시’를 세 번 읽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본존님의 훌륭한 공덕이 더해지고 자기 자신의 내면에 맑고 힘찬 부처의 생명을 용출시켜 행복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 열어 갈 수 있습니다.

      <제목삼창>

      불법에서 말하는 삼제는 공제(空諦), 가제(假諦), 중제(中諦)를 뜻합니다.
      여기서 ‘제(諦)’는 ‘명백함’ ‘자세함’이라는 뜻으로, 모든 현상의 진실한 모습을 세가지 차원에서 파악한 것이 삼제입니다.
      이 삼제를 생명의 차원에서 본다면 내 생명의 진실한 상(相)을 세가지의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공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분이며, 주로 마음과 정신 작용에 해당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에도 나타나지 않다가 연을 만나면 나타나는 불가사의한 실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제’는 육체나 모습 등 그 현상의 면을 말하는데,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임시로 존재할 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중제’는 생명의 본질, 생명 전체를 말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마음이라는 ‘공’의 면과 육체라는 ‘가’의 면을 동시에 갖추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고 있기에, 이들을 꿰뚫는 생명의 본질이 ‘중제’입니다.
      (삼제를 배우면 육체인 물질에도, 마음인 정신에도 치우치지 않고 생명의 전체상을 올바로 보고 ‘생명을 존중하자.’는 깊은 뜻이 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삼제의 원칙에서 우리 불계 생명의 이름, 제목인 남묘호렌게쿄를 세번 부르는 것입니다.
  • 근행 할 때, 종을 치는 이유와 횟수는?

    • 이것은 부처님을 찬미하기 위하여 종이나 여러 가지 음률 즉 음악을 연주하여 부처님의 마음을 편안히 받들어 모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종을 치는 근본입니다.그러므로 잇달아 세게 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본존에 대해서 부처님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법화경의 방편품을 읽으면 분명합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는 악기가 그 시절에 있었다면 연주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곤란할 것입니다.
      설마 어본존께 악기를 가지고 연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종은 그 시절의 음악이었습니다. 종은 7. 3. 5로 치고 있습니다.
      세 번 쳐야 좋은가, 일곱 번 쳐야 좋은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종을 칠 때에는 첫째 모두 나란히 앉아서 근행. 창제를 올리고 있을 때에 멈추시오. 시작하시오 라는 뜻으로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호입니다. 그러나 원래의 뜻은 부처님을 평안하게 해 드리고 부처님께 위로를 올리는 것입니다. (도다 조세이 지도집)
  • 남묘호렌게쿄는 일본어인데, 우리말로 나무묘법연화경으로 부르면 안되나요?

    • “南無妙法蓮華經”는 영구불변의 법이며 구극의 언어입니다.

      그것을 번역하여 제목을 불러서는 안됩니다. 南無妙法蓮華經의 의미를 배우기 위해 어서를 독일에서는 독일어로, 영국에서는 영어로 번역하여 해석하는 것은 괜찮지만, 부르는 제목은 어디까지나 南無妙法蓮華經입니다.
      제목은 순간에 부처에게 통하는 세계 공통어입니다.
      예를 들면, 범어에서 妙法蓮華經를 ‘살달마(薩達磨) 분다리가(芬陀梨伽) 소다람(蘇多覽)’으로 말한다고 해서 제목을 ‘나무 살달마 분다리가 소다람’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리나 리듬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음악에도 각각의 곡에는 독특한 음률이 있습니다. 베토벤의 곡을 봐도 그 곡은 베토벤이 느끼는 마음의 음률이며 민족이나 언어, 문화의 차이를 뛰어넘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南無妙法蓮華經란 우주의 법칙이며 대우주의 근본 리듬에 합치해 가는 음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제목 소리의 울림에 생명이 감응하는 것입니다. 제목이란 그처럼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南無妙法蓮華經를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한다면 제목의 음률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제목을 각 나라 언어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신인간혁명 6권 젊은 독수리)
  • 근행을 왜 해야 하나요?

    • SGI회장 : 알기 쉽게 말하면, 근행에는‘생명의 정돈’‘생명의 조정’을 위한 작용이 있습니다.
      불행(不幸)의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궤도를 조정해 갑니다. 또한 창제는 복운(福運)의‘저금’으로 됩니다. 비에 의해 잔디의 푸르름이 되살아나듯이, 생명을 생생하게 소생시키고, 열어서 원만한 완성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한평생 본존님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묘법(妙法)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영원히 전진해 나아가자, 어디까지라도 동지와 함께 광선유포를 향하여 끝까지 걸어가자’ - 그 신심의 일념에 이미 ‘부처’의 힘이 약동(躍動)하는 것입니다. (유럽4개국의 방문을 마치고 공항에서 1991 년 6 월 30 일)
  • 기원을 하려고 해도 잡념이 일어나서 괴롭습니다.

    • SGI회장 : 잡념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겠지요. 그대로 어본존에게 부딪쳐 가면 됩니다. 잡념도 일념삼천의 생명의 작용 이외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잡념조차도 제목에 의해서 공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기원하는 방법에‘꼭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형식은 없습니다. 꾸미지 않아도 좋습니다. 정좌하여 굳은 자세로 제목을 부른다 해도 마음의 움직임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신심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일념은 서게 됩니다.
      또 기원하는데 떠오르는 잡념이나 생각은 그 당시 자신이 신경을 쓰고 있는 과제이므로 잡념이라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착실하게 기원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지요.
      커다란 것만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나 하나 빠짐없이 기원하여 성취하고, 그것을 다져 가는 것입니다. 물론 신경질적으로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목을 진지하게 부르는 것입니다. (법화경의 지혜6권 관세음보살 보문품(하))
  • 기원을 한 번에 많이 해도 괜찮을까요. 아니면 하나씩 해결하는 편이 좋을까요?

    • SGI회장 : 기원은 아무리 많아도 좋습니다. 기원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진지하게 제목을 많이 하면 됩니다. 많은 물건을 사려면 돈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뿐입니다. 또 그것이 도리입니다.
      누가 기원을 이루어주는가. 자신입니다. 자신의 신심과 노력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자신의 물건을 사는 데 자신의 돈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돈이 없으면 안됩니다. 자신의 신심의 실천이‘돈’입니다. (법화경의 지혜6권 관세음보살 보문품(하))
  • 제목을 부를 때에는 어떠한 마음으로 본존님께 향하면 좋습니까?

    • SGI회장 : 부처와 대면하는 것이므로 엄숙한 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본존님께 부딪쳐 가면 됩니다. 본존님은 대자비의 부처님이십니다. 자기자신이 원하는 것, 고민하는 것, 희망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원해 가는 것입니다. 힘들 때, 슬플 때 괴로울 때에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팔에 몸을 던져 매달리듯이‘본존님!’이라고 부르며 사심 없이 부딪쳐 가면 됩니다. 본존님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십니다. 마음속을 다 털어놓듯이, 대화하듯이 제목을 거듭해 가는 것입니다. 이윽고 지옥 같은 괴로움도 거짓말 처럼, 이슬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사죄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또 승부를 낼 때에는 반드시 이긴다고 정하고 사자가 으르렁거리듯이, 아수라가 사납게 날뛰듯이, 대우주를 곧 흔들기라도 할 듯이 끝까지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밤에는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깊은 감사의 제목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서에는‘조조(朝朝). 부처와 함께 일어나며 석석(夕夕) 부처와 함께 눕고…’(어서737쪽)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제목을 끝까지 부른 사람은 언제나 본존님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도 현세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본존님이 제천제불이 지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 오저로부터 안도할 수 있고 그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유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끝까지 살아가면 됩니다. 제목은 고뇌를 환희로 바꿉니다. 더욱이 환희를 대 환희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쁠때나 슬플 때나,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무슨 일이 있어도 오로지 제목을 끝까지 불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이 제목이라는 것이 인생을 승리하는 제일의 요체입니다. (신인간혁명11권 개간)
  • 제목은‘부르는 자세’와‘부르는 양’, 어느 쪽이 중요한 것입니까? ‘질’과‘양’이라고 할까요?

    • SGI회장 : 10만리라(이탈리아의 통화)의 지폐는 1만리라의 지폐보다도 질이 높습니다. 10만리라 지폐 쪽이 좋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진지하고 확신 있는 창제가 중요합니다. 그 위에 10만리라 지폐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웃음) ‘질’도 ‘양’도 양쪽이 다 중요한 것입니다.
      또 불법에서는 감응(感應)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전화는 감도가 좋으면 작은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속삭여도 통합니다. 외치는 듯한 소리로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해도(웃음)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원이 통하는 데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린애가 “엄마∼”라고 부모에게 안기는 듯한 기분으로 부딪혀 가는 것입니다.
      어서에는「대저 신심(信心)이라고 함은 별다른 것이 아닙니다」(어서 1255쪽) - 무릇 신심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 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좋은 것입니다.
      무작(無作)이라고나 할까.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때로는 응석받이가 돈을 달라고 떼쓰듯이,(폭소) 생각한 대로 기원해 가는 것입니다. 본존님은 부모이고 우리들은 자식이므로, 귀여운 자식이 끈질기게 말하는데,(폭소) 용돈을 주지 않을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큰웃음, 대박수)
      다만 조금은‘착한 자식’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폭소) 부모(대성인)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그 지도대로 성장해 가면 최후에는 기원은 절대로 이루어집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한 신심입니다. 창제(唱題)도 ‘자신이 만족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얼마만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형식은 아닙니다. 목표를 세우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피곤할 때라든가, 졸릴 때라든가, 마음도 텅비어,(웃음) 타성으로 입을 움직이고 있을 뿐(폭소)이라면 - 그보다도 빨리 쉬어 발랄한 심신(心身)으로 하는 편이 가치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아, 상쾌하다’라고 만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매일매일의 축적이 자연스럽게‘소원만족’의 인생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대표간부회 1992 년 7 월 3일)
  • 기원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고민입니다.

    • SGI회장 : ‘기원으로써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는 신심입니다. 먼저 그렇게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어느 시점만을 보면 기원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기원을‘지속하면’최후에는 반드시 가장 좋은 방향으로 향해 갑니다. 훗날 뒤돌아보았을 때 그것을 알게 되는 법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고생하는 것에 의해 자신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기원해서 아무거나 금방 이루어진다면 인간은 타락해 버리고 맙니다. 노력도 괴로움도 없는 안이한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얄팍한 인간이 됩니다. 그래서는 무엇을 위한 신앙이겠습니까. 계속해서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러 가지 괴로움이 나옵니다. 인생은 그것의 연속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으므로 인생은 충실해 지고 또 즐겁습니다. 성장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넓고 강한 경애가 열립니다.
      무엇이든 기원해서 곧바로 이루어진다면‘요술’입니다.‘도리(道理)’에 맞지 않습니다. 쌀도 넣지 않고 전기밥솥의 스위치를 켠다고 해서 밥이 될 리가 없습니다.
      불법은 도리이며 신심즉생활의 올바른‘궤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현실’을 무시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상의 노력도 없이 안이하게 기원만 한다고 이루어질 리는 없습니다.
      생활즉신심, 신심즉노력이라는‘정도(正道)’를 철저하게 나아가는 것이‘중도’입니다. 관념적인‘일시적 위안의 신앙’도 아니며 안이한 ‘요술(妖術)의 신앙’도 아닙니다.
      기원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신심에 의합니다. 또 각자의 숙업적인 뿌리의 깊이도 다르고,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의미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기원’이라는 엔진에 의해 반드시 기원한 그 순간부터 ‘좋은 방향으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법화경의 지혜6권 관세음보살 보문품(하))
  • 신심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 SGI회장 : 개인에 대하여 말하자면 일생성불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를 쌓는 일입니다.
      더욱 알기 쉽게 말하자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자신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요컨대 인간혁명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말하자면 광선유포입니다. 광선유포란 사람들에게 올바른 불법을 가르쳐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인류의 평화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신인간혁명9권 광채)
  • 혼자서만 신심 하면 안됩니까?

    • SGI회장 : 신심은 어디까지나 학회 조직 속에서 해야만 합니다.
      현실적으로 광선유포를 위해 단결하고 이체동심으로 전진하는 단체는 창가학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혼자 하는 신심이 편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자기 중심의 신심이 됩니다.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인간은 오직 인간의 대해(大海) 속에서 단련할 수 있습니다. 선배가 있고, 동료가 있고, 후배가 있는 그런 관계 속에서 갈고 닦았을 때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신심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신심은 결국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막아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화합승(和合僧)의 조직이 중요합니다. (제18회 본부간부회 2002 년 7 월 3 일)
  • 우리들이 사용하는 회관을 왜 문화회관이라고 하나요?

    • SGI회장 : 문화회관도 일반회관도 기능과 내용은 같습니다.
      그러나 굳이‘문화’라는 이름을 붙인 회관 건설을 추진해 온 것은 광선유포가 인간 문화의 창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그것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보람이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중의 사회를 구축하고 다양한 인간 문화의 꽃을 피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종교가 사회 건설의 힘이 되어야 비로소 종교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신인간혁명11권 약진)
  • 가족이 신심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 SGI회장 : 가정에서 자기 혼자만 신심하고 있다 하더라도, 태양은 하나가 떠오르면 전 세계를 비춥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태양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 웃는 얼굴을 보면 흐뭇해진다. 그 발랄한 성장을 보면 진심으로 안심할 수 있다. 전보다도 훨씬 빛나고 있다. 훨씬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졌다.
      –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인간혁명 해 가는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성장, 자신의 행동이 중요해 집니다. 가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도 가족의 마음,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은혜에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소중히 해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하물며 신앙상의 문제로 쓸데없이 다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마음으로부터 소중해 해 드려 주세요. 어버이의 마음은 어버이가 되어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절대로 쓸쓸한 마음을 갖게 해서는 안됩니다. 태양 곁에 있는 사람은 모두 따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두 행복하게 되어 갑니다. 그것을 위한 신앙입니다. (청년과의 대화 제15회 )
  • 신심을 하지 않는 사람 중에도 훌륭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만...

    • SGI회장 : 그렇겠지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신심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로 차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신앙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하는 우리들은 그 이상으로 훌륭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겸허하게 배워야 할 점은 배우면서 그러한 훌륭한 사람과 우정을 맺어 가야 합니다.
      훌륭한 것처럼 보여도 그 사람 속까지는 좀처럼 알 수 없습니다.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한 걸음 들어가 보면 심각한 고민을 안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행복한 듯이 보여도 그것이 계속된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돈이 있어 행복한가. 유명해서 행복한가. 큰 집에 살고 있으면 행복한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명했기 때문에 명성을 잃은 순간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명성으로 만심에 차서 자신을 못쓰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큰 집에 살면서 사이가 나빠 마음이 냉랭한 가족도 있습니다.
      그런 덧없는‘상대적 행복’ 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명 그 자체를 궁전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절대적 행복’ 입니다. 자신이 궁전과 같이 넓은 마음이 되어 궁전과 같이 빛나고 있다면 어디에 있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한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사(死)’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현명한 사람이라도‘죽음’의 고통을 해결할 수는 없다.
      ‘죽음’이라는 근본의 고뇌를 타고 넘어‘영원한 생명’을 감득하려면 올바른 불법을 실천하는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청춘대화1.제20회 근행창제란(하))
  • 어서나 교학공부는 어려워서 잘 모르겠습니다.

    • SGI회장 : 어렵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배우자!’라는 신심입니다. 그 구도심만 있다면 인간혁명이 되어갑니다.
      도다 선생님은 자주 말씀하셨다.‘안다’는 것 보다‘바뀐다’는 것이라고.
      가령 팔만법장을‘알았다’ 손치더라도 자신이 인간혁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혁명하기 위한 교학입니다. 신심을 강하게 하기 위한 교학입니다. 조금씩이라도 끊임없이 배우는‘신심’이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법화경의 지혜5권 여래신력품3)

      SGI회장 : 교학이라고 듣기만 해도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불법자로서 인생의 철학을 가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먼저 처음은 어려운 어서가 아니어도 좋으니까 착실히 배독 하여 자기 자신의 몸으로 읽어 가도록 제안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겨울과 같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되느니라”(1253쪽)는 유 명한 어문이라도 좋습니다. 또는 “젖은 나무에서 불을 내고 마른 흙에서 물을 얻으려 하듯”(1132쪽)이라는 어문도 좋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마음을 정하여 어문대로 정진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그대로다!’고 실감하여 본존님에 대한 대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서를 배독하는 것이며 ‘실천하는 교학’인 것입니다.
      하나의 어문을 몸으로 읽고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자연히 다른 어서도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것에 통하게 됩니다. (신인간혁명11권 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