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질문과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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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할 때 그 의미를 알고 해야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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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의 참된 의미를 알고 독송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탈리아어를 일본인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에게는 통합니다.
또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외국인이라도 그대로 올바르게 발음하면 상대에게는 통합니다.
연인끼리는 눈만으로도 통할런지도 모르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세계에 통하는 ‘말’이 있습니다.
설령 그 의미를 모르더라도 그 말은 불(佛)·보살(菩薩)의 세계에 제대로 통하여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입니다.
근행에서 독송(讀誦)하고 있는 경문도 그런 것입니다. 또 구마라습이 한역한 법화경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까지 가장 훌륭하고 가장 법화경의 참뜻을 잘 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불님이신 대성인께서도 구마라습역의 법화경을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구마라습의 번역보다 더 우수한 법화경의 번역이 장래 세상에 나온다면 그것을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도다(戶田) 선생님도 말씀하시고 있었습니다.
- 이케다 선생님 스피치 1992.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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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의 참된 의미를 알고 독송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탈리아어를 일본인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에게는 통합니다.
또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외국인이라도 그대로 올바르게 발음하면 상대에게는 통합니다.
연인끼리는 눈만으로도 통할런지도 모르겠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의 세계에 통하는 ‘말’이 있습니다.
설령 그 의미를 모르더라도 그 말은 불(佛)·보살(菩薩)의 세계에 제대로 통하여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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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할 때, 창제는 얼마만큼 하는 것이 좋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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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제에는 ‘반드시 몇 시간을 해야 한다’든지 ‘몇 번을 해야 한다’고 정해진 규칙은 전혀 없습니다. 이케다 선생님도 “‘아, 상쾌하다’고 자신이 만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하루하루의 축적이 자연스럽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생을 열어 간다.”고 말했듯이 마음껏 진지하게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나 양에 사로잡힌 나머지 형식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족할 만큼 창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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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제에는 ‘반드시 몇 시간을 해야 한다’든지 ‘몇 번을 해야 한다’고 정해진 규칙은 전혀 없습니다. 이케다 선생님도 “‘아, 상쾌하다’고 자신이 만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하루하루의 축적이 자연스럽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생을 열어 간다.”고 말했듯이 마음껏 진지하게 부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이나 양에 사로잡힌 나머지 형식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자신이 만족할 만큼 창제하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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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근행의 자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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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시의 음성, 제목의 수, 눈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나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알아두어야만 할 점이 있습니다.
근행은 신앙의 기본이며 어본존에게 귀명(歸命)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기 때문에 자세를 바로 하여 정확하고 절도있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근행과 창제시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총본산 제59세 니찌고 상인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제목을 봉창하는 방법은 신(身)에 방심이나 게으름이 없도록 의(意)에 여념과 잡념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입에서 내는 소리는 말이 너무 빠르다거나 우물거려서는 안 된다. 침착하고 확고하며 끝이 강하게 중음(中音)으로 봉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봉창하는 수는 정해져 있지 않고 많거나 적거나 그 사람의 형편이지만 몸은 양손바닥을 합장하고 손가락 끝이 코밑을 향하도록 하며, 눈은 확실히 어본존을 향하도록 하고 그리고 몸전체가 환희로 용약하도록 해야만 한다」라고.
근행할 때의 소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소리에 의연하고 강력한 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생명력이 없는 소리로는 숙업을 전환하고 마를 타파하는 힘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큰 소리로 하는 창제는 물론 좋지 않습니다. 깊은 밤이거나 이웃에 폐가 되는 경우는 잘 배려해서 작은 소리로 창제하도록 주의해야만 하겠습니다. 「성불사(聲佛事)를 하다」라고 말합니다만 힘차고 씩씩하게 정확한 발음과 리듬 바른 울림이 있는 소리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제목의 수에 대해서는 니치고상인의 지남에 있는 것과 같이 「몇 시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라든가 「몇 번이면 족하다」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흡족할 때까지 그리고 진지하게 창제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수에 치우치거나 형식적으로 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발심으로 납득이 갈 때까지 창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창제시에 명심해야만 할 것은 기원하는 목표를 명확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점이 막연하면 진지함이 결여된 근행이 되어 버립니다. 나날의 기원과 창제는 자기 자신이 발심하여 명확한 목표를 틀림없이 결정해서 할 때 큰 경애를 여는 인(因)이 되는 것입니다. 눈의 위치에 대해서는 눈은 크게 뜨고 어본존을 직시합니다. 「묘(妙)」의 문자를 중심으로 정시(正視)하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습니다. 눈을 감고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하물며 졸면서 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 알기 쉬운 불법대화(화광신문 : 9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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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시의 음성, 제목의 수, 눈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나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알아두어야만 할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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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창제를 할 때 왜 두 손을 모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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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장(合掌)이란 좌우 손바닥과 손가락을 가슴 앞으로 모은 자세로서 인도에서 옛부터 행해져 온 인사법의 한 종류입니다.
불법(佛法)에서는 부처·보살을 예배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에 합장을 하는데, 니치렌대성인 불법에서도 이 방식으로 근행·창제를 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의 경문에도 ‘모두 한마음으로 합장’이라고 있습니다.
합장은 불법을 믿는 진지한 자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신의 내면에서 불계(佛界)라는 존극한 생명이 용현한다는 사실을 깊이 믿고 본존님을 향해 진지하게 창제하는 순수한 확신의 신심이 ‘합장’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 본존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합장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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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장(合掌)이란 좌우 손바닥과 손가락을 가슴 앞으로 모은 자세로서 인도에서 옛부터 행해져 온 인사법의 한 종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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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할 때 십여시 부분을 왜 세 번 반복해서 읽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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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품의 ‘소위제법, 여시상, 여시성 … 여시본말구경등’이라고 세 번 반복해 읽는 부분을 ‘십여시’라고 합니다.
‘여시’란 간략하게 말하면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물의 진실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 움직임을 열 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설하고 있는 것이 ‘십여시’입니다.
그런데, 십여시를 세 번 반복해 읽는 이유를 니치렌 대성인은 「세 번 읽으면 공덕이 뛰어나다)」(어서 412쪽)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것에 대해 이케다 선생님은 “‘내 몸이 존귀한 부처이다’라고 선언하고 신심의 공덕을 더하기 위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 읽는 이유는 깊은 법리를 배경으로 하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단적인 예로는 다음의 세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부처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현실 속 부처의 행위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본존님을 향하는 자기 자신이 그대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당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측면을 기리기 위해 ‘십여시’를 세 번 읽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본존님의 훌륭한 공덕이 더해지고 자기 자신의 내면에 맑고 힘찬 부처의 생명을 용출시켜 행복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 열어 갈 수 있습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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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품의 ‘소위제법, 여시상, 여시성 … 여시본말구경등’이라고 세 번 반복해 읽는 부분을 ‘십여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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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 할 때, 종을 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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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부처님을 찬미하기 위하여 종이나 여러 가지 음률 즉 음악을 연주하여 부처님의 마음을 편안히 받들어 모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종을 치는 근본입니다. 그러므로 잇달아 세게 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본존에 대해서 부처님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법화경의 방편품을 읽으면 분명합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편안케 하기 위해서는 악기가 그 시절에 있었다면 연주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도 곤란할 것입니다. 설마 어본존께 악기를 가지고 연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종은 그 시절의 음악이었습니다. 종을 칠 때에는 첫째 모두 나란히 앉아서 근행. 창제를 올리고 있을 때에 멈추시오. 시작하시오 라는 뜻으로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호입니다. 그러나 원래의 뜻은 부처님을 평안하게 해 드리고 부처님께 위로를 올리는 것입니다.
- 도다 조세이 지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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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부처님을 찬미하기 위하여 종이나 여러 가지 음률 즉 음악을 연주하여 부처님의 마음을 편안히 받들어 모시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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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하는 도중에 눈을 감으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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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분명하게 뜨고 어본존을 똑바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차원은 다르지만 이전에 영국 귀족의 자제들은 어릴 적부터 ‘상대방의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근행. 창제는 어본존과 마주하는 것이므로 눈을 감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눈을 감으면 어본존과 감응이 약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눈이 부자유한 사람은 어본존을 마음에 떠올리고 하면 됩니다.
- 청춘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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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분명하게 뜨고 어본존을 똑바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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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건상, 근행 창제를 할 때 작은 소리로 하고 있는데 그래도 공덕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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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존님을 믿는 한 작은 소리라도 근행·창제를 하면 공덕은 엄연히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조금이라도 창제를 하자!’ ‘매일, 본존님께 기원하자!’며 도전을 계속하는 마음이 존귀하다”고 지도했습니다.
진지한 신심이 있으면 기원은 전부 본존님께 통합니다. 그러므로 주위를 배려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는 자신의 귀에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근행·창제를 해도 상관없으며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마음속으로 기원해도 좋습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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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존님을 믿는 한 작은 소리라도 근행·창제를 하면 공덕은 엄연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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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들이 잠옷 바람으로 자꾸 근행을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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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본존님을 향할 때는 부처님을 뵙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남 앞에 나가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옷차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매일 근행을 실천하는 자체가 매우 훌륭한 일이므로 부모로서 최대한 칭찬해 주면서 바른 옷차림을 갖추고 근행을 하도록 가르쳐 주면 어떨까요.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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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본존님을 향할 때는 부처님을 뵙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남 앞에 나가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옷차림을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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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 때문에 근행 도중에 참석했는데 괜찮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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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히 근행한 것으로 됩니다. 근행 도중에 참석한 경우, 그 흐름에 맞추어 함께 창제하면 됩니다.
일부러 작은 소리로 처음부터 근행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또, 가정에서도 가족이 모두 모여 근행을 할 때, 집안일이나 그 밖의 일로 바빠 뒤늦게 근행에 참석한 경우에도 똑같이 중심자에게 맞추어 근행하면 됩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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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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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입원하게 되었는데 근행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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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근행을 할 경우, 같은 방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취침 시간이나 기상 시간 등 병원의 규칙을 지키면서 작은 목소리로 해도 좋고 마음속으로 기원해도 좋습니다. 병실이 특실이거나 주위 환자들과 병원에 양해를 얻어 근행을 할 수 있을 경우에는 수호본존님을 모시고 근행하는 것도 좋습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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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근행을 할 경우, 같은 방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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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회 때, 염주를 잊고 참석했는데 괜찮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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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는 원래 바라문교에서 사용한 것으로 후세에 불교에서 도입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승려가 날짜를 세거나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횟수 등을 헤아리기 위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염주는 불교 역사에서 불도 수행을 돕는 도구로서 정착되어 왔지만 염주가 없다고 해서 근행의 공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니치렌 대성인도 어서에서 염주의 중요성에 대해 특별히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염주를 잊었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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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는 원래 바라문교에서 사용한 것으로 후세에 불교에서 도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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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할 때 반드시 무릎을 꿇고 정좌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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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좌하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형식일 뿐이며 근행할 때 반드시 무릎을 꿇고 정좌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자에 앉아서 해도 좋고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책상다리나 옆으로 포개 앉아도 상관없습니다.
본래 풍요로운 마음으로 해야 할 근행·창제가 정좌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자세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본존님을 배알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일부러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불법(佛法)에는 ‘수방비니(隨方毘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법의 본의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각국·각 지역의 풍속·습관, 시대 풍습에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릎을 꿇는 습관이 없는 국가나 지역에서는 무릎을 꿇는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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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좌하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형식일 뿐이며 근행할 때 반드시 무릎을 꿇고 정좌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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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을 자주 가는데, 근행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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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 동안의 출장이라면 그 동안의 근행은 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평소 집에서 근행을 열심히 했다면 출장 기간 중의 근행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수호본존님을 받은 분은 주위의 여건에 맞추어 수호본존님을 향해 근행하면 됩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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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 동안의 출장이라면 그 동안의 근행은 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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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일로 조석근행 시간이 일정치 않은데 괜찮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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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 시간은 특별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생활 리듬에 맞추어 아침과 저녁에 근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점심이 지난 후에 아침 근행을 했다든지 반대로 점심 무렵에 저녁 근행을 하고 출근하는 등 근행 시간이 일정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근무 형태나 개개인의 사정에 맞추어 하루 중 자신에게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을 선택해 근행해도 괜찮습니다.
또, 근행할 때에는 이웃과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주위 상황이나 시간대를 생각하지 않고 큰 소리로 근행을 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겠지요. 양식 있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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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 시간은 특별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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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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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할 때 창제하면서 방편품·수량품을 읽는 것은 니치렌 대성인이 정하신 수행입니다.
이 근행의 근본은 창제행이 ‘정행’이고, 방편품·수량품을 읽는 것은 창제행의 공덕을 돕기 위한 ‘조행’입니다.
대성인 재세 당시에는 ‘5좌(座)·3좌’라는 근행 형식은 없었으며 어서에도 닛코 상인이 쓰신 문헌에도 그 내용은 없습니다.
‘5좌·3좌’라는 형식이 적혀 있는 최초의 문헌 자료로는 1719년, 에도 시대에 니치칸 상인이 가가(지금의 이시카와 현)에 살던 신도에게 주신 편지의 사본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무렵부터 ‘5좌·3좌’라는 근행 형식이 만들어졌으리라고 추측됩니다.
본래 ‘초좌, 이좌’와 같은 ‘좌’라는 명칭은 승려들이 절의 본당이나 어영당을 돌며, 자리를 바꾸어 근행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근행은 수행인 이상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도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이유로 창가학회에서는 도다 제2대 회장 시절에 자신의 생명을 연마하는 엄격한 수행의 실천으로 승려들과 똑같은 ‘5좌·3좌’ 근행을 하기로 결정하여 지금까지 실천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세계 광선유포의 시대를 맞이한 지금 해외, 특히 한자 문화권이 아닌 미국이나 유럽SGI의 회원들 발음하기도 어려운 장시간의 5좌·3좌 근행에 부담을 느끼고 있으며 때문에 입회하기를 꺼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존 회원 중에서 퇴전하는 경우마저 있었습니다. 본래, ‘창제’가 정행이고 ‘독경(讀經)’은 조행임에도 불구하고 바쁜 아침 시간에 5좌 근행이라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2년 4월에 개최된 SGI총회에서는 아침·저녁 근행시 방편품·자아게(自我偈)만을 독송해도 대성인의 가르침에 비추어 수행의 본의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무방하다고 결정, 한국SGI에서는 2002년 5월에 개최되었던 제62회 상임중앙회의의 의결을 거쳐 방편품·자아게만 독송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새벗을 위하여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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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행할 때 창제하면서 방편품·수량품을 읽는 것은 니치렌 대성인이 정하신 수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