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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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즉생활] - 이체동심, 신심즉생활, 사람의 행동
관리자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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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체동심
‘이체동심(異體同心)’은 우리가 신심으로 단결해 광선유포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할 지침입니다.
‘이체’는 각각의 겉보기, 개성, 특질, 처지 등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동심’은 뜻, 목적을 같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가 같은 마음으로 힘을 합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불법을 실천함에 있어, 만인성불을 실현하고자 묘법을 설하고 넓히는 ‘광선유포’야말로 부처의 대원(大願)이자 근본 목적입니다. ‘동심(同心)’의 ‘심’은 ‘신심’을 말하고, ‘광선유포’라는 대원에 마음을 합치는 일입니다.
즉 각자의 개성과 특질을 살려 한사람 한사람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광선유포를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이체동심입니다.
이에 비해 겉보기는 같은 모습이지만 각각의 뜻과 목적이 서로 달라 따로따로 흩어진 상태를 ‘동체이심(同體異心)’이라고 합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체동심이면 만사(萬事)를 이루고 동체이심이면 제사(諸事)가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니치렌의 동류는 이체동심이기에, 사람들은 적지만 대사(大事)를 성취하여, 반드시 법화경이 넓혀지리라고 생각하오.”(어서 1463쪽)
신심의 단결로 여러가지 난을 이겨내면서 전진하면 불법이 반드시 넓혀질 것은 틀림없다고 대성인은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지도하십니다.
“이체동심을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조직’입니다. ‘이체’는 사람들 각기 모습도 처지도 상황도 사명도 다르다. 그러나 ‘마음’은 즉 신심은 ‘동심’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이체이심’이면 따로따로입니다. ‘동체동심’은 억지로 모양이나 모습까지 통일하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독재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유가 없습니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고 모습만 맞추고 있다. 결국은 ‘동체이심’이 되고 맙니다.”
“‘이체’는 개성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동심’은 신심을 근본으로 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단결입니다.”
우리는 이체동심의 지침 그대로 한사람 한사람이 충분히 힘을 발휘하면서 대성인의 유명이신 광선유포 실현을 향해서 전진합시다.
►신심즉생활
일반적으로 신앙이란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진 특별한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신앙시간과 생활시간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서는 신앙과 생활은 그렇게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서에는 “사관(仕官)을 법화경이라고 생각하시라.”(어서 1295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관’은 주군 등을 섬기는 일인데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에서 본다면 해야 할 일, 맡은 바 책임입니다. 직업, 일, 생활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어서는 나날의 생활이 그대로 불도수행의 도량이며, 신심을 근본으로 한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자리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활은 우리의 생명활동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신심은 우리 생명을 변혁하고 알차게 하는 힘이 됩니다.
생활에서 직면하는 여러 과제에 대해 어본존을 향한 제목을 근본으로 진지한 노력을 거듭할 때 그 현실과의 투쟁 그 자체가 우리의 불계의 생명을 용현시키는 기연(機緣)이 되어 자신의 생명변혁의 무대가 됩니다.
또 신심으로 개척한 생명력, 풍부한 경애를 토대로 하여 생활의 무대로 용감하게 나설 때, 생활 그 자체도 자연스럽게 변혁됩니다.
신심을 초목의 뿌리로 비유한다면, 생활은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줄기와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을 근본으로 하지 않는 생활은 환경에 흘러가는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맙니다. 신심의 뿌리가 깊을수록 반석 같은 생활을 구축할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입니다.
이와 같이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신심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창가학회의 지도에서는 ‘신심즉생활’이라 하여 생활은 그 사람의 신심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신뢰받는 사회인으로서 생활에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행동
불법은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가르친 종교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교주석존의 출세의 본회(本懷)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소이다.”(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석존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불법을 설한 그 근본 목적(출세의 본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즉 인간사회에서 양식 있는 행동으로 직장, 지역 등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아 빛나는 인격자로 존경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신심의 증명이 됩니다.
최고의 ‘사람의 행동’은 ‘남을 존중하는’ 행동입니다.
즉 만인의 생명 속에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믿고 그 부처의 생명을 존중하여 만인을 존경하는 행동입니다. 근본은 만인을 성불시키겠다는 서원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눈앞의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법화경에서는 만인의 내면에 숨겨진 부처의 생명을 존중하여 모든 사람을 예배하는 불경보살의 실천을 설합니다.
자신의 불계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부처의 생명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인을 ‘불자(佛子, 부처의 자식)’이라고 존중하는 생명존엄, 만인평등이 바로 불법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있으면 타인을 짓밟는 일체의 폭력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인존중의 원리에 입각하여 대화로써 사회 변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입니다.
악세 말법은 사람들의 미혹의 생명이 강해져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인간을 차별하고, 도구화하는 사상이 충만한 시대입니다. 그런 탁한 사회 풍조를 바꾸어 인간 자신의 경애를 높이려면 생명존엄, 인간존경의 ‘사람의 행동’의 실천을 넓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회를 변혁하려면 사람들의 미혹을 조장하고, 인간을 멸시하는 사상과 용감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넓히고, 악을 책하는 행동이 바로 불법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행동은 불법자 그리고 인간으로서 승리의 인생을 증명해 줍니다.
‘이체동심(異體同心)’은 우리가 신심으로 단결해 광선유포할 때 가장 중요시해야 할 지침입니다.
‘이체’는 각각의 겉보기, 개성, 특질, 처지 등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동심’은 뜻, 목적을 같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각자가 같은 마음으로 힘을 합쳐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불법을 실천함에 있어, 만인성불을 실현하고자 묘법을 설하고 넓히는 ‘광선유포’야말로 부처의 대원(大願)이자 근본 목적입니다. ‘동심(同心)’의 ‘심’은 ‘신심’을 말하고, ‘광선유포’라는 대원에 마음을 합치는 일입니다.
즉 각자의 개성과 특질을 살려 한사람 한사람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광선유포를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이체동심입니다.
이에 비해 겉보기는 같은 모습이지만 각각의 뜻과 목적이 서로 달라 따로따로 흩어진 상태를 ‘동체이심(同體異心)’이라고 합니다.
대성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체동심이면 만사(萬事)를 이루고 동체이심이면 제사(諸事)가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니치렌의 동류는 이체동심이기에, 사람들은 적지만 대사(大事)를 성취하여, 반드시 법화경이 넓혀지리라고 생각하오.”(어서 1463쪽)
신심의 단결로 여러가지 난을 이겨내면서 전진하면 불법이 반드시 넓혀질 것은 틀림없다고 대성인은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지도하십니다.
“이체동심을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조직’입니다. ‘이체’는 사람들 각기 모습도 처지도 상황도 사명도 다르다. 그러나 ‘마음’은 즉 신심은 ‘동심’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이체이심’이면 따로따로입니다. ‘동체동심’은 억지로 모양이나 모습까지 통일하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독재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유가 없습니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고 모습만 맞추고 있다. 결국은 ‘동체이심’이 되고 맙니다.”
“‘이체’는 개성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동심’은 신심을 근본으로 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단결입니다.”
우리는 이체동심의 지침 그대로 한사람 한사람이 충분히 힘을 발휘하면서 대성인의 유명이신 광선유포 실현을 향해서 전진합시다.
►신심즉생활
일반적으로 신앙이란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진 특별한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일상생활 속에서도 신앙시간과 생활시간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서는 신앙과 생활은 그렇게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서에는 “사관(仕官)을 법화경이라고 생각하시라.”(어서 1295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관’은 주군 등을 섬기는 일인데 오늘날의 우리의 처지에서 본다면 해야 할 일, 맡은 바 책임입니다. 직업, 일, 생활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이 어서는 나날의 생활이 그대로 불도수행의 도량이며, 신심을 근본으로 한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자리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활은 우리의 생명활동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신심은 우리 생명을 변혁하고 알차게 하는 힘이 됩니다.
생활에서 직면하는 여러 과제에 대해 어본존을 향한 제목을 근본으로 진지한 노력을 거듭할 때 그 현실과의 투쟁 그 자체가 우리의 불계의 생명을 용현시키는 기연(機緣)이 되어 자신의 생명변혁의 무대가 됩니다.
또 신심으로 개척한 생명력, 풍부한 경애를 토대로 하여 생활의 무대로 용감하게 나설 때, 생활 그 자체도 자연스럽게 변혁됩니다.
신심을 초목의 뿌리로 비유한다면, 생활은 풍요로운 열매를 맺는 줄기와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을 근본으로 하지 않는 생활은 환경에 흘러가는 떠돌이 신세가 되고 맙니다. 신심의 뿌리가 깊을수록 반석 같은 생활을 구축할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입니다.
이와 같이 대성인의 불법에서는 신심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창가학회의 지도에서는 ‘신심즉생활’이라 하여 생활은 그 사람의 신심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고, 신뢰받는 사회인으로서 생활에 승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행동
불법은 ‘인간으로서의 승리’를 가르친 종교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교주석존의 출세의 본회(本懷)는 사람의 행동에 있었소이다.”(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석존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불법을 설한 그 근본 목적(출세의 본회)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즉 인간사회에서 양식 있는 행동으로 직장, 지역 등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아 빛나는 인격자로 존경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신심의 증명이 됩니다.
최고의 ‘사람의 행동’은 ‘남을 존중하는’ 행동입니다.
즉 만인의 생명 속에 부처의 생명이 있다고 믿고 그 부처의 생명을 존중하여 만인을 존경하는 행동입니다. 근본은 만인을 성불시키겠다는 서원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눈앞의 한 사람을 소중히 하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법화경에서는 만인의 내면에 숨겨진 부처의 생명을 존중하여 모든 사람을 예배하는 불경보살의 실천을 설합니다.
자신의 불계를 아직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부처의 생명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인을 ‘불자(佛子, 부처의 자식)’이라고 존중하는 생명존엄, 만인평등이 바로 불법의 정신입니다. 이 정신이 있으면 타인을 짓밟는 일체의 폭력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인존중의 원리에 입각하여 대화로써 사회 변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니치렌 대성인 불법입니다.
악세 말법은 사람들의 미혹의 생명이 강해져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인간을 차별하고, 도구화하는 사상이 충만한 시대입니다. 그런 탁한 사회 풍조를 바꾸어 인간 자신의 경애를 높이려면 생명존엄, 인간존경의 ‘사람의 행동’의 실천을 넓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회를 변혁하려면 사람들의 미혹을 조장하고, 인간을 멸시하는 사상과 용감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넓히고, 악을 책하는 행동이 바로 불법에서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행동은 불법자 그리고 인간으로서 승리의 인생을 증명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