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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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학회의 역사] -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 시대
관리자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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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 시대
1945년 7월 3일, 2년 동안의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출옥한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오직 홀로 광선유포를 위해 일어서 이사장으로서 괴멸상태에 빠진 학회재건에 곧바로 착수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패전의 혼란과 황폐로 인해 일본 민중은 도탄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국민이 강요당한 국가신도 등 신념, 가치관은 부정되었지만,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그 민중을 구하는 대법리는 니치렌 불법밖에 없다며 광선유포의 대원에 나섰습니다.
먼저 교육개혁뿐만 아니라, 광선유포라는 전 민중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목표로 하는 학회의 목적에 입각한 학회의 명칭을 ‘창가학회’로 바꾸고 좌담회와 지방지도도 재개했습니다.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의 만남
1947년에는 도다 선생님과 제3대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이 사제로서 만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1928년 1월 2일, 도쿄 오타구 오모리기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이 점차 전쟁에 돌입하던 아홉살 때 중일전쟁, 열세살 때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전황이 악화하는 속에 한창 일할 나이인 형 네명이 모두 징병으로 끌려가게 되어 이케다 선생님은 집안을 보살피며 군수공장에서 일하지만 이 무렵부터 결핵을 앓아 생사(生死)의 문제를 생각하며 고뇌하는 청춘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쟁터에서 일시 귀국한 큰형에게 들은 전쟁으로 아시아 민중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말과, 공습으로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전쟁의 모순과 비참함을 통감합니다. 특히 다시 출정한 큰형이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전사한 사실을 전쟁이 끝나고 알게 됩니다. 이때 슬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전쟁의 죄악(罪惡)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문학이나 철학서적을 통해 확고한 인생의 자세를 모색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케다 선생님은 1947년 8월 14일, 처음으로 창가학회 좌담회에 참석해 그 자리에서 생애 스승인 도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이날, 도다 선생님은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강의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에게 ‘올바른 인생이란’ ‘진정한 애국자란’ ‘남묘호렌게쿄란’ 잇따라 질문했습니다. 군부정부와 싸우며 2년 동안 옥중투쟁을 관철한 도다 선생님의 깊은 신념이 맥동하고,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답변에 이케다 선생님은 ‘이 사람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1947년 8월 24일, 신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마흔일곱살, 이케다 선생님이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 이듬해 다이세이학원(현재 도쿄후지대학교) 야간부에 입학합니다.
9월에는 도다 선생님의 법화경 강의 수강생이 되어 불법연찬을 심화하는 속에 도다 선생님을 스승으로 받들어 광선유포에 꿋꿋이 살아갈 것을 서원합니다.
또 1949년 1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입사해 소년잡지 편집에 종사합니다.
사제공전(師弟共戰)으로 학회재건
1949년 7월에는 창가학회 기관지로서 새롭게 ‘대백연화(大白蓮華)’가 탄생합니다. 그 창간호에 도다 선생님은 논문 ‘생명론’을 집필했습니다.
그뒤 도다 선생님의 사업은 혼란한 경제의 영향으로 어려움에 처해 이듬해 1950년 8월 24일, 도다 선생님은 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할 의향을 발표합니다.
이때 “앞으로 제 스승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고생만 시켰지만 자네 스승은 나일세.” 하고 사제의 유대를 확인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 사업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속에서 이 궁지를 타개하여 반드시 도다 선생님을 학회 회장으로 모시겠다고 깊이 결의했습니다.
스승을 돕기 위해 야학을 단념한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대학교육보다 뛰어난 모든 학문의 개인교수를 해주셨습니다. 이 개인교수는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기 전까지 이어져 ‘도다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이러한 악전고투 속에서도 도다 선생님은 늘 곁에 있던 이케다 선생님에게 광포의 언론전을 위한 기관지 발간과 소카대학교 설립 등 미래의 구상을 말했습니다. 세이쿄신문도 소카대학교도 이 사제의 대화에서 탄생했습니다.
제2대 회장 취임
역경을 극복한 도다 선생님은 많은 회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3일, 제2대 회장에 취임합니다. 그 인사말에서 75만 세대 절복을 달성하겠다는 서원을 선언합니다. 당시 학회원은 실질적으로 약 3000명 정도로 누구도 믿지 못할 홍교 목표였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회장 취임을 앞두고 학회조직을 재편해, 그 후 발전의 기반이 되는 지부체제를 정비하고 광선유포를 위한 포진을 새롭게 했습니다.
회장 취임 직전인 4월 20일에는 기관지 ‘세이쿄신문’을 창간해 도다 선생님은 창간호부터 묘오공(妙悟空)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인간혁명≫을 집필해 연재했습니다.
《인간혁명》은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여 각자 자신의 생명경애를 변혁하고 전 인류의 숙명전환(宿命轉換)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도다 선생님은 생명론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혁명의 이념을 내걸고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현대에 전개했습니다.
또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곧바로 부인부를 비롯한 남자부, 여자부 등 각부를 잇따라 결성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듬해 1952년 연초, 도다 선생님의 명을 받아 가마타지부의 지부간사가 된 이케다 선생님은 2월 한달 동안에 지부에서 201세대의 홍교를 추진해, 당시 홍교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2월투쟁) 이것이 계기가 되어 75만 세대 달성을 향해 학회 전체의 홍교에 가속도가 붙어 전진이 시작됩니다.
한편, 도다 선생님은 어서전집 발간에도 착수했습니다. 광선유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서를 올바르게 연찬하는 것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석학이신 니치코 상인에게 편찬을 의뢰하여 1952년 4월, 입종 700년의 가절을 맞아 ≪니치렌 대성인어서전집≫을 발간했습니다. 이 어서전집을 한사람 한사람이 진지하게 연찬함으로써 어서근본의 정신이 학회 전체에 확립됩니다.
권력의 마성이 준동
학회는 민중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투쟁하신 니치렌 대성인의 ‘입정안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아 부패한 정치를 정화하고 정치를 민중의 손에 되돌려주기 위해 1955년 4월 통일지방선거에서 최초로 독자적으로 추천한 후보를 내세웠습니다.
이듬해 1956년,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에서 비약적인 절복을 추진해 5월에는 오사카지부가 1만 1111세대라는 미증유(未曾有)의 홍교를 달성합니다. 또 7월에 실시한 참의원선거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지원활동의 책임을 맡은 오사카 선거구에서 당선은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학회가 지지한 후보자가 당선합니다. 일반신문에서도 “설마가 실현”이라는 표제를 내걸 정도의 멋진 승리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학회가 추천한 참의원 세명이 탄생합니다. 이 무렵부터 창가학회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띤 단체로 주목받게 됨과 동시에 여러 기성세력의 부당한 압력이 가해지게 됩니다.이러한 탄압에 맞서 이케다 선생님은 학회원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싸웠습니다. 홋카이도의 유바리 탄광노조가 신교(信敎)의 자유를 짓밟고 학회원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57년 6월, 곧바로 현지로 달려가 탄광노조에 단호히 항의하는 자세를 분명히 해 사건해결을 위해 분투했습니다.(유바리탄광노조사건)
그 직후인 7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부 경찰에 부당하게 체포되었습니다.(오사카사건)
이것은 그해 4월에 실시된 참의원 오사카지방선거구 보궐선거에서 선거위반자가 나온 것과 관련하여 선거지원 책임자인 이케다 선생님을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세워 사실무근한 죄를 덮어씌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 7월 3일은 1945년 도다 선생님이 출옥한 날과 같은 날이며, 이케다 선생님은 훗날 ‘출옥과 입옥의 날에 사제(師弟) 있노라’ 하고 읊었습니다.
15일 동안에 걸친 가혹한 취조에서 검찰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도다 회장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미 도다 선생님의 몸은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을 지키기 위해 일단은 죄를 뒤집어쓰고 그 후 재판에서 결백을 증명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7월 17일에 오사카구치소에서 석방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로부터 4년 반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1962년 1월 25일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확정되었습니다.
광선유포의 후계를 맡기다
1957년 9월 8일, 도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평화운동의 기조가 되는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합니다.
이 선언에서는 불법(佛法)의 생명존엄의 원리에서 핵무기를 인류의 생존권을 빼앗는 ‘마(魔)’의 산물로 포착하고 핵무기 사용을 절대악으로서 단죄합니다.
그해 12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서원(誓願)하신 75만 세대 홍교를 달성합니다.
이듬해 1958년 3월에는 학회가 다이세키사(大石寺)에 건립해 기진한 대강당이 완성됩니다. 3월 16일,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자리에 모인 청년부 6000명에게 광선유포의 일체를 맡기는 의식을 여는 자리에서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도다 선생님이 후계 청년에게 광선유포의 대원을 맡기신 이 ‘3·16’은 훗날 ‘광선유포기념일’이 됩니다.
1958년 4월 2일, 도다 선생님은 모든 원업(願業)을 이룩하고 향년 쉰여덟살에 서거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 오달을 원점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광선유포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1945년 7월 3일, 2년 동안의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출옥한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오직 홀로 광선유포를 위해 일어서 이사장으로서 괴멸상태에 빠진 학회재건에 곧바로 착수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패전의 혼란과 황폐로 인해 일본 민중은 도탄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국민이 강요당한 국가신도 등 신념, 가치관은 부정되었지만,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그 민중을 구하는 대법리는 니치렌 불법밖에 없다며 광선유포의 대원에 나섰습니다.
먼저 교육개혁뿐만 아니라, 광선유포라는 전 민중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목표로 하는 학회의 목적에 입각한 학회의 명칭을 ‘창가학회’로 바꾸고 좌담회와 지방지도도 재개했습니다.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의 만남
1947년에는 도다 선생님과 제3대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이 사제로서 만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1928년 1월 2일, 도쿄 오타구 오모리기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일본이 점차 전쟁에 돌입하던 아홉살 때 중일전쟁, 열세살 때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전황이 악화하는 속에 한창 일할 나이인 형 네명이 모두 징병으로 끌려가게 되어 이케다 선생님은 집안을 보살피며 군수공장에서 일하지만 이 무렵부터 결핵을 앓아 생사(生死)의 문제를 생각하며 고뇌하는 청춘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쟁터에서 일시 귀국한 큰형에게 들은 전쟁으로 아시아 민중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말과, 공습으로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전쟁의 모순과 비참함을 통감합니다. 특히 다시 출정한 큰형이 버마(현재 미얀마)에서 전사한 사실을 전쟁이 끝나고 알게 됩니다. 이때 슬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전쟁의 죄악(罪惡)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문학이나 철학서적을 통해 확고한 인생의 자세를 모색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케다 선생님은 1947년 8월 14일, 처음으로 창가학회 좌담회에 참석해 그 자리에서 생애 스승인 도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이날, 도다 선생님은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강의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에게 ‘올바른 인생이란’ ‘진정한 애국자란’ ‘남묘호렌게쿄란’ 잇따라 질문했습니다. 군부정부와 싸우며 2년 동안 옥중투쟁을 관철한 도다 선생님의 깊은 신념이 맥동하고,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답변에 이케다 선생님은 ‘이 사람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1947년 8월 24일, 신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마흔일곱살, 이케다 선생님이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 이듬해 다이세이학원(현재 도쿄후지대학교) 야간부에 입학합니다.
9월에는 도다 선생님의 법화경 강의 수강생이 되어 불법연찬을 심화하는 속에 도다 선생님을 스승으로 받들어 광선유포에 꿋꿋이 살아갈 것을 서원합니다.
또 1949년 1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입사해 소년잡지 편집에 종사합니다.
사제공전(師弟共戰)으로 학회재건
1949년 7월에는 창가학회 기관지로서 새롭게 ‘대백연화(大白蓮華)’가 탄생합니다. 그 창간호에 도다 선생님은 논문 ‘생명론’을 집필했습니다.
그뒤 도다 선생님의 사업은 혼란한 경제의 영향으로 어려움에 처해 이듬해 1950년 8월 24일, 도다 선생님은 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할 의향을 발표합니다.
이때 “앞으로 제 스승은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고생만 시켰지만 자네 스승은 나일세.” 하고 사제의 유대를 확인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 사업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속에서 이 궁지를 타개하여 반드시 도다 선생님을 학회 회장으로 모시겠다고 깊이 결의했습니다.
스승을 돕기 위해 야학을 단념한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대학교육보다 뛰어난 모든 학문의 개인교수를 해주셨습니다. 이 개인교수는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기 전까지 이어져 ‘도다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이러한 악전고투 속에서도 도다 선생님은 늘 곁에 있던 이케다 선생님에게 광포의 언론전을 위한 기관지 발간과 소카대학교 설립 등 미래의 구상을 말했습니다. 세이쿄신문도 소카대학교도 이 사제의 대화에서 탄생했습니다.
제2대 회장 취임
역경을 극복한 도다 선생님은 많은 회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1951년 5월 3일, 제2대 회장에 취임합니다. 그 인사말에서 75만 세대 절복을 달성하겠다는 서원을 선언합니다. 당시 학회원은 실질적으로 약 3000명 정도로 누구도 믿지 못할 홍교 목표였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회장 취임을 앞두고 학회조직을 재편해, 그 후 발전의 기반이 되는 지부체제를 정비하고 광선유포를 위한 포진을 새롭게 했습니다.
회장 취임 직전인 4월 20일에는 기관지 ‘세이쿄신문’을 창간해 도다 선생님은 창간호부터 묘오공(妙悟空)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인간혁명≫을 집필해 연재했습니다.
《인간혁명》은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여 각자 자신의 생명경애를 변혁하고 전 인류의 숙명전환(宿命轉換)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도다 선생님은 생명론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혁명의 이념을 내걸고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현대에 전개했습니다.
또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곧바로 부인부를 비롯한 남자부, 여자부 등 각부를 잇따라 결성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듬해 1952년 연초, 도다 선생님의 명을 받아 가마타지부의 지부간사가 된 이케다 선생님은 2월 한달 동안에 지부에서 201세대의 홍교를 추진해, 당시 홍교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2월투쟁) 이것이 계기가 되어 75만 세대 달성을 향해 학회 전체의 홍교에 가속도가 붙어 전진이 시작됩니다.
한편, 도다 선생님은 어서전집 발간에도 착수했습니다. 광선유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서를 올바르게 연찬하는 것이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석학이신 니치코 상인에게 편찬을 의뢰하여 1952년 4월, 입종 700년의 가절을 맞아 ≪니치렌 대성인어서전집≫을 발간했습니다. 이 어서전집을 한사람 한사람이 진지하게 연찬함으로써 어서근본의 정신이 학회 전체에 확립됩니다.
권력의 마성이 준동
학회는 민중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투쟁하신 니치렌 대성인의 ‘입정안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아 부패한 정치를 정화하고 정치를 민중의 손에 되돌려주기 위해 1955년 4월 통일지방선거에서 최초로 독자적으로 추천한 후보를 내세웠습니다.
이듬해 1956년,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에서 비약적인 절복을 추진해 5월에는 오사카지부가 1만 1111세대라는 미증유(未曾有)의 홍교를 달성합니다. 또 7월에 실시한 참의원선거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지원활동의 책임을 맡은 오사카 선거구에서 당선은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학회가 지지한 후보자가 당선합니다. 일반신문에서도 “설마가 실현”이라는 표제를 내걸 정도의 멋진 승리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학회가 추천한 참의원 세명이 탄생합니다. 이 무렵부터 창가학회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띤 단체로 주목받게 됨과 동시에 여러 기성세력의 부당한 압력이 가해지게 됩니다.이러한 탄압에 맞서 이케다 선생님은 학회원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싸웠습니다. 홋카이도의 유바리 탄광노조가 신교(信敎)의 자유를 짓밟고 학회원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57년 6월, 곧바로 현지로 달려가 탄광노조에 단호히 항의하는 자세를 분명히 해 사건해결을 위해 분투했습니다.(유바리탄광노조사건)
그 직후인 7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부 경찰에 부당하게 체포되었습니다.(오사카사건)
이것은 그해 4월에 실시된 참의원 오사카지방선거구 보궐선거에서 선거위반자가 나온 것과 관련하여 선거지원 책임자인 이케다 선생님을 사건의 주모자로 몰아세워 사실무근한 죄를 덮어씌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 7월 3일은 1945년 도다 선생님이 출옥한 날과 같은 날이며, 이케다 선생님은 훗날 ‘출옥과 입옥의 날에 사제(師弟) 있노라’ 하고 읊었습니다.
15일 동안에 걸친 가혹한 취조에서 검찰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도다 회장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미 도다 선생님의 몸은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을 지키기 위해 일단은 죄를 뒤집어쓰고 그 후 재판에서 결백을 증명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7월 17일에 오사카구치소에서 석방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로부터 4년 반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1962년 1월 25일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확정되었습니다.
광선유포의 후계를 맡기다
1957년 9월 8일, 도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평화운동의 기조가 되는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합니다.
이 선언에서는 불법(佛法)의 생명존엄의 원리에서 핵무기를 인류의 생존권을 빼앗는 ‘마(魔)’의 산물로 포착하고 핵무기 사용을 절대악으로서 단죄합니다.
그해 12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서원(誓願)하신 75만 세대 홍교를 달성합니다.
이듬해 1958년 3월에는 학회가 다이세키사(大石寺)에 건립해 기진한 대강당이 완성됩니다. 3월 16일, 도다 선생님은 이케다 선생님을 비롯하여 한자리에 모인 청년부 6000명에게 광선유포의 일체를 맡기는 의식을 여는 자리에서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도다 선생님이 후계 청년에게 광선유포의 대원을 맡기신 이 ‘3·16’은 훗날 ‘광선유포기념일’이 됩니다.
1958년 4월 2일, 도다 선생님은 모든 원업(願業)을 이룩하고 향년 쉰여덟살에 서거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 오달을 원점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광선유포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