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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교학

 

  • [일생성불과 광선유포] - 일생성불

  • 관리자

  •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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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일생성불과 광선유포

►일생성불

신심의 근본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이 부처의 경애를 얻는 일입니다.
어본존을 신수하고 순수하게 자행화타를 열심히 실천하면 어떠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일생 동안에 성불의 경애를 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일생성불’이라고 합니다.
자행화타의 ‘자행’은 자기가 공덕을 받기 위한 수행이고, ‘화타’는 타인이 공덕을 받도록 교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행, 창제에 면려함과 동시에 불법을 이야기하고 교화하는 홍교(弘敎)의 실천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법화경의 행자는 여설수행(如說修行)을 하면 반드시 일생 중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성불하느니라. 비유하면 봄 여름에 농사를 짓는 데 조만(早晩)은 있을지라도 일년 중에는 반드시 이를 거둬 들이듯”(어서 416쪽) (통해 : 법화경 행자는 부처가 설한 대로 수행하면 반드시 일생 동안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불할 수 있다. 비유하면 봄, 여름에 농사를 짓는데 빨리 열매를 맺는 품종과 늦게 맺는 품종의 차이는 있어도 일년 동안에 모두 반드시 수확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불은 현재의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인간이 된다거나, 사후에 다음 생에서 현실세계를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서에는 성불의 ‘성(成)’은 “성이란 연다는 의의이고”(어서 753쪽) 하고 씌어 있습니다. 
성불은 자기 내면에 갖춰진 부처의 생명경애(불계〈佛界〉)를 여는 것을 말합니다.
‘범부’ 다시 말해 보통 사람인 우리가 지금 모습 그대로 부처의 생명경애를 개현(開顯)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부성불’ 또는 ‘즉신성불’이라고도 합니다.
성불은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 현실세계에서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어서에 “앵매도리(櫻梅桃李)의 각기의 당체를 고치지 아니하고 무작삼신(無作三身)이라고 개견(開見)하면”(어서 784쪽) (통해 : 벚꽃, 매화, 복숭아, 자두에는 각각의 특질이 있
듯 우리도 각각의 특질을 고치지 않고도 그대로의 모습으로 무작삼신의 부처라고 개현하는 것이다. ‘무작삼신의 부처’는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처의 특질을 모두 갖춘 참된 부처를 말함)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성불은 본디 자기의 특질을 살려서 더욱더 충실하게 사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즉 성불은 생명이 정화되어 본디 갖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여 갖가지 어려움에 부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굳센 경애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성불은 종점에 도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묘법을 수지하여, 악을 없애고 선을 낳는 싸움을 계속하는 그 경애가 부처의 경애입니다. 
끊임없이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범부성불, 즉신성불

‘범부’는 보통 사람을 말합니다. 법화경에서는 범부의 몸에 본디 부처의 경애를 갖추고 있기에 개현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몸에 위대한 부처의 경애를 열 수 있습니다. 이를 ‘범부즉극(凡夫卽極)’ 또는 ‘범부즉불(凡夫卽佛)’이라고도 합니다.
성불은 인간이 갖춘 본디 부처의 경지(境地, 본유〈本有〉의 불계〈佛界〉)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에서 동떨어진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범부의 몸에 부처라는 최고의 인간성을 개현한다는 것이 대성인의 성불관(成佛觀)입니다.
이러한 성불을 ‘즉신성불’이라고 합니다. 즉신성불은 중생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 범부의 몸을 바꾸지 않고 부처의 경애를 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화경 이외의 여러 경전에서는 ‘성불’을 설하지만 적어도 두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 악인, 여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이승들은 위대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스스로 굳게 믿고 아라한(阿羅漢, 성문의 가르침으로 최고의 깨달음을 득하는 자)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그치고, 번뇌를 완전히 없앤 경지로서 몸과 마음을 멸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이러한 이승을 대승의 여러 경전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엄하게 비난했습니다.
또 중생이 악인이라면 선인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고, 여성이라면 남성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악인과 여성은 그 몸 그대로는 성불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불을 설하지만 현실적으로 성불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둘째, 몇번이고 생사를 되풀이해서 불도수행을 해야(역겁수행〈歷劫修行〉), 범부의 경애를 벗어나 부처의 경애에 도달한다고 했습니다.
범부의 몸 그대로 일생 동안에 성불이와 반대로 법화경에서는, 성불은 ‘부처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 몸에 ‘불계의 생명경애를 여는 것’이라고 설했습니다.
대성인은 모든 부처를 부처로 만든 근원법을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근원법과 하나가 된 대성인 자신의 생명을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신수함으로써 누구나 자신의 생명에 불계를 개현할 수 있습니다.
니치칸(日寬) 상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본존을 신수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우리 몸이 즉 일념삼천의 본존, 연조성인(蓮祖聖人)이니라.”(《니치칸 상인 문단집》)
어본존을 신수하고 광선유포의 실천과 신심을 관철하면 범부의 몸 그대로 흉중에 대성인과 똑같은 부처의 생명경애를 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범부의 몸 그대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즉신성불, 일생 동안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일생성불이라 하는데 둘 다 같은 법리를 표현한 말입니다.
〈니치칸 상인은 에도 시대의 학승으로 니치렌 대성인이 닛코 상인에게 계승한 불법의 법리를 정리하여 선양했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즉신성불의 법리를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이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입니다. 
소승교라 불리는 여러 경전에서는 고뇌의 원인은 자신의 번뇌에 있다고 설하고, 고뇌를 해결하려면 번뇌를 소멸시키는 수밖에 없다 하여 수많은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거듭하여 해탈(解脫, 깨달음으로 고뇌에서 해방)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번뇌를 완전히 없앤 경지로서 몸과 마음을 소멸시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은 결국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권대승교라 불리는 여러 경전에서는 소승교를 실천하는 이승과 악인 그리고 여성의 성불을 부정합니다.
실질적으로는 소승교와 마찬가지로 범부와 부처 사이에 넘기 어려운 단절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부처에 대해서도 아미타불과 대일여래 등, 인간을 초월하고 현실세계에서 유리된 다른 세계에 사는 가공의 부처를 설합니다.
범부가 부처가 되려면 생사를 반복하는 동안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를 일부분씩 차례로 배우고 수행하여 터득해야 한다고 설합니다.
또 자신의 힘으로는 위대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부처의 절대적인 힘으로 구제받기를 강조하는 생각도 나타납니다.
이에 비해서 법화경에서는 자비와 지혜가 넘치는 부처의 경지를 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고, 그것을 개현함으로써 성불할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번뇌에 뒤덮여 악업을 쌓아 고뇌에 허덕이는 범부일지라도 자신 안에 불계를 갖추었다는 진실에 눈을 뜨면 부처가 깨달은(보리〈菩提〉) 지혜를 발휘해, 고뇌에서 해방되어 자유자재의 경지를 득할 수 있습니다.
번뇌에 뒤덮인 고뇌의 몸이 그대로 보리의 지혜에 빛나는 자유자재의 몸이 됩니다. 이 법리(法理)를 ‘번뇌즉보리’라고 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계를 남묘호렌게쿄라고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믿고 제목을 불러, 존엄할 정도의 참된 자신에 눈을뜨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솟아오르고 고난에 도전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확신과 용기가 생겨,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자비도 나타납니다.
‘생사즉열반’이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면 생사로 인해 발생하는 괴로운 경애에 놓인 생명에, 부처의 깨달음으로 득할 수 있는 안온한 경애(열반)를 개현할 수 있다고 밝힙니다.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의 법리는 묘법의 신심에 서면 온갖 고뇌를 자신의 성장과 행복의 밑거름으로 전환하는 적극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상대적 행복과 절대적 행복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은 행복에는 ‘상대적 행복’과 ‘절대적 행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상대적 행복은 물질적으로 충족되거나 욕망이 만족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욕망에는 끝이 없고, 설령 일시적으로 만족스러운 것 같아도 영속성이 없습니다. 외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성립하는 행복이므로 그 조건이 무너지면 그 행복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에 비해서 절대적 행복은 어디에 있어도 또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 있는 그 자체가 행복하고 즐거운 경애를 말합니다. 그것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행복이기에 절대적 행복이라 합니다. 성불은 이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 세계에 사는 이상, 인생에는 갖가지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등산에 비유한다면 건장한 사람은 다소 무거운 짐을 짊어져도 유유히 산을 오를 수 있듯이, 자신의 생명에 절대적 행복경애를 확립한 사람은 갖가지 어려움이 일어나도 그 어려움을 발판으로 삼아 더욱 강한 생명력을 발휘하여 역경을 유유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장한 사람은 오히려 산길이 험하면 험할수록 그것을 극복하는 기쁨을 맛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는 생명력과 지혜를 터득한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소용돌이치는 현실세계 그 자체가 충실감으로 가득 찬 가치창조(價値創造)의 자리입니다.
또 환경에 의존하는 상대적 행복이 ‘죽음’으로 단절되는 데 비해, 절대적 행복인 부처의 경애는 “자신, 법성의 대지를 생사생사로 유전(流轉)해 가느니라.”(어서 724쪽) (통해 : 자기 몸이 묘법의 대지를 생사생사로 유전한다.) 하고 말씀하셨듯이 죽음을 뛰어넘어서 존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