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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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치렌 대성인의 생애] - 사도유죄•미노부입산
관리자
2021-10-20
2,172
►사도유죄
다쓰노구치법난 뒤 얼마 동안, 막부는 대성인에 대한 처우를 정하지 못하고 약 한 달 동안 대성인을 사가미 지방의 에치(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북부)에 있는 혼마 로쿠로 자에몬 시게쓰라(사도 지방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마쿠라 시대 영지에서 치안과 경비를 맡았던 직책〉)의 저택에 유치(留置)했습니다. 그 사이 대성인 문하에게 방화, 살인 등의 누명을 씌우는 등, 갖가지 탄압을 가했습니다.
결국 사도유배가 결정되어 대성인은 1271년 10월 10일에 에치를 출발하여 11월 1일에 사도 쓰카하라의 공동묘지에 있는 몹시 허름한 삼매당(三昧堂, 장례용 사당)에 들어갔습니다. 대성인은 살을 에는 엄동설한에 옷가지와 식량마저 부족했습니다. 사도의 염불자로부터 생명에 위협을 받는 등 혹독한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탄압은 가마쿠라 문하에게도 미쳐, 땅굴에 갇히거나 추방되고, 소령 몰수 등의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문하가 대성인 불법에 의심을 일으켜 겁쟁이들은 몸을 사리고 퇴전했습니다.
이듬해인 1272년 1월 16일과 17일에는 사도뿐만 아니라 호쿠리쿠, 신에쓰 지방에서 여러 종파의 승려 수백 명이 작당하여 대성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혼마 시게쓰라가 말려서 법론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대성인은 각 종파의 사의(邪義)를 모조리 논파하셨습니다(쓰카하라문답).
2월에는 호조 집안에 내란이 일어나서 가마쿠라와 교토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2월소동〈二月騷動〉, 호조 도키스케의 난〈亂〉). 대성인이 다쓰노구치 법난 때 예언하신 자계반역난이 불과 150일 뒤에 일어났습니다.같은 해 초여름에 대성인의 귀양지가 쓰카하라에서 이치노사와로 옮겨졌지만 변함없이 염불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도유배 동안 닛코 상인은 대성인을 상수급사(常隨給仕)하여 고난을 함께하셨습니다. 또 사도에서도 아부쓰보, 센니치니 부부를 비롯해 대성인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중요한 어서를 많이 집필하셨는데, 특히 중요한 어서가 〈개목초(開目抄)〉와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입니다.
1272년 2월에 쓰신 〈개목초〉는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법화경에서 예언한 대로 실천한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고, 말법의 중생을 구하는 주사친(主師親)의 삼덕(三德)을 갖춘 말법의 본불이라고 밝힌 인본존개현(人本尊開顯)의 서(書)입니다.
또 1273년 4월에 쓰신 〈관심본존초〉는 말법의 중생이 성불을 위해 수지(受持)해야 할 남묘호렌게쿄의 본존(本尊)을 설한 법본존개현(法本尊開顯)의 서(書)입니다.
1274년 2월, 대성인이 사면되어 3월에는 사도를 떠나 가마쿠라로 돌아오셨습니다. 4월에 헤이노 사에몬노조를 대면한 대성인은 몽고조복(蒙古調伏) 기도를 진언(眞言) 등의 사법(邪法)에 따라 실시하는 막부를 강하게 간언함과 동시에 헤이노 사에몬노조의 질문에 대답해 몽고의 내습은 반드시 연내에 일어난다고 예언하셨습니다(제3회 국주간효).
이 예언대로 같은 해 10월에 몽고의 대군이 규슈 지방을 습격했습니다(문영〈文永〉의 전역〈戰役〉).
이것으로 〈입정안국론〉에서 예언하신 자계반역난과 타국침핍난의 두 난이 모두 적중했습니다.
이처럼 막부를 상대로 직접 간효하여 국난을 예언한 일은 이것으로 세번째가 됩니다.(첫번째는 〈입정안국론〉을 제출한 때, 두번째는 다쓰노구치법난 때) 이 예언이 적중함으로써 니치렌 대성인은 “나에게 세번의 고명(高名)이 있노라”(어서 287쪽) 하고 말씀하십니다(세번의 고명).
〈고명이란 특별히 뛰어난 ‘명예’, ‘명성’을 말함.〉
►미노부 입산
세번째 간효도 막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니치렌 대성인은 가마쿠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이 지방(현재의 야마나시현) 하키이 고을에 있는 미노부산에 들어가셨습니다. 미노부는 닛코 상인의 교화(敎化)로 대성인 문하가 된 지두 하키이 로쿠로 사네나가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대성인은 1274년 5월에 미노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의 미노부입산은 결코 은거(隱居, 속세를 떠나서 조용히 사는 일)가 아니었습니다.
미노부에서 대성인은 〈선시초(撰時抄)〉, 〈보은초(報恩抄)〉를 비롯하여 수많은 어서를 집필하시고 대성인 불법의 중요한 법문을 설했습니다. 특히 삼대비법(三大秘法,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단, 본문의 제목)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화경 강의 등을 통해서 미래의 광포를 짊어질 인재 육성에 온힘을 쏟으셨습니다.
또 각지의 남성, 여성의 재가신도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 격려하셨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강성한 신심을 관철하여 인생의 승리와 성불의 경애를 득할 수 있도록 간절한 지도와 격려를 계속하셨습니다.
다쓰노구치법난 뒤 얼마 동안, 막부는 대성인에 대한 처우를 정하지 못하고 약 한 달 동안 대성인을 사가미 지방의 에치(현재의 가나가와현 아쓰기시 북부)에 있는 혼마 로쿠로 자에몬 시게쓰라(사도 지방의 슈고다이〈守護代, 가마쿠라 시대 영지에서 치안과 경비를 맡았던 직책〉)의 저택에 유치(留置)했습니다. 그 사이 대성인 문하에게 방화, 살인 등의 누명을 씌우는 등, 갖가지 탄압을 가했습니다.
결국 사도유배가 결정되어 대성인은 1271년 10월 10일에 에치를 출발하여 11월 1일에 사도 쓰카하라의 공동묘지에 있는 몹시 허름한 삼매당(三昧堂, 장례용 사당)에 들어갔습니다. 대성인은 살을 에는 엄동설한에 옷가지와 식량마저 부족했습니다. 사도의 염불자로부터 생명에 위협을 받는 등 혹독한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탄압은 가마쿠라 문하에게도 미쳐, 땅굴에 갇히거나 추방되고, 소령 몰수 등의 처분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문하가 대성인 불법에 의심을 일으켜 겁쟁이들은 몸을 사리고 퇴전했습니다.
이듬해인 1272년 1월 16일과 17일에는 사도뿐만 아니라 호쿠리쿠, 신에쓰 지방에서 여러 종파의 승려 수백 명이 작당하여 대성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혼마 시게쓰라가 말려서 법론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대성인은 각 종파의 사의(邪義)를 모조리 논파하셨습니다(쓰카하라문답).
2월에는 호조 집안에 내란이 일어나서 가마쿠라와 교토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2월소동〈二月騷動〉, 호조 도키스케의 난〈亂〉). 대성인이 다쓰노구치 법난 때 예언하신 자계반역난이 불과 150일 뒤에 일어났습니다.같은 해 초여름에 대성인의 귀양지가 쓰카하라에서 이치노사와로 옮겨졌지만 변함없이 염불자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도유배 동안 닛코 상인은 대성인을 상수급사(常隨給仕)하여 고난을 함께하셨습니다. 또 사도에서도 아부쓰보, 센니치니 부부를 비롯해 대성인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대성인은 사도에서 중요한 어서를 많이 집필하셨는데, 특히 중요한 어서가 〈개목초(開目抄)〉와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입니다.
1272년 2월에 쓰신 〈개목초〉는 니치렌 대성인이야말로 법화경에서 예언한 대로 실천한 말법의 ‘법화경 행자’이고, 말법의 중생을 구하는 주사친(主師親)의 삼덕(三德)을 갖춘 말법의 본불이라고 밝힌 인본존개현(人本尊開顯)의 서(書)입니다.
또 1273년 4월에 쓰신 〈관심본존초〉는 말법의 중생이 성불을 위해 수지(受持)해야 할 남묘호렌게쿄의 본존(本尊)을 설한 법본존개현(法本尊開顯)의 서(書)입니다.
1274년 2월, 대성인이 사면되어 3월에는 사도를 떠나 가마쿠라로 돌아오셨습니다. 4월에 헤이노 사에몬노조를 대면한 대성인은 몽고조복(蒙古調伏) 기도를 진언(眞言) 등의 사법(邪法)에 따라 실시하는 막부를 강하게 간언함과 동시에 헤이노 사에몬노조의 질문에 대답해 몽고의 내습은 반드시 연내에 일어난다고 예언하셨습니다(제3회 국주간효).
이 예언대로 같은 해 10월에 몽고의 대군이 규슈 지방을 습격했습니다(문영〈文永〉의 전역〈戰役〉).
이것으로 〈입정안국론〉에서 예언하신 자계반역난과 타국침핍난의 두 난이 모두 적중했습니다.
이처럼 막부를 상대로 직접 간효하여 국난을 예언한 일은 이것으로 세번째가 됩니다.(첫번째는 〈입정안국론〉을 제출한 때, 두번째는 다쓰노구치법난 때) 이 예언이 적중함으로써 니치렌 대성인은 “나에게 세번의 고명(高名)이 있노라”(어서 287쪽) 하고 말씀하십니다(세번의 고명).
〈고명이란 특별히 뛰어난 ‘명예’, ‘명성’을 말함.〉
►미노부 입산
세번째 간효도 막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니치렌 대성인은 가마쿠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이 지방(현재의 야마나시현) 하키이 고을에 있는 미노부산에 들어가셨습니다. 미노부는 닛코 상인의 교화(敎化)로 대성인 문하가 된 지두 하키이 로쿠로 사네나가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대성인은 1274년 5월에 미노부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의 미노부입산은 결코 은거(隱居, 속세를 떠나서 조용히 사는 일)가 아니었습니다.
미노부에서 대성인은 〈선시초(撰時抄)〉, 〈보은초(報恩抄)〉를 비롯하여 수많은 어서를 집필하시고 대성인 불법의 중요한 법문을 설했습니다. 특히 삼대비법(三大秘法, 본문의 본존, 본문의 계단, 본문의 제목)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화경 강의 등을 통해서 미래의 광포를 짊어질 인재 육성에 온힘을 쏟으셨습니다.
또 각지의 남성, 여성의 재가신도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 격려하셨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강성한 신심을 관철하여 인생의 승리와 성불의 경애를 득할 수 있도록 간절한 지도와 격려를 계속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