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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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론과 일생성불] - 사성
관리자
201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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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도(六道)에서 사성(四聖)으로
지옥계에서 천계까지 육도는 결국 자신의 외부조건에 좌우됩니다.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는 천계의 기쁨을 느끼고 환경이 평온할 경우에는 인계의 편안함을 누릴 수 있지만 일단 그런 조건이 상실됐을 경우에는 곧바로 지옥계나 아귀계의 괴로운 경애로 전락하고 맙니다. 환경에 좌우된다는 의미에서 육도의 경애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적인 경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반해 육도의 경애를 넘어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주체적인 행복 경애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 불도수행입니다. 그리고 불도수행으로 얻어지는 경애가 성문, 연각, 보살, 불의 사성입니다.
▶ 성문계•연각계
성문계와 연각계 둘은 불교 중에서도 소승교의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경애이며, 이 성문계와 연각계를 한데 모아 ‘이승(二乘)’이라고 부릅니다. 성문계는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는 경애입니다. 이에 반해 연각계는 여러가지 현상을 연으로 하여 혼자 힘으로 불법의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는 경애로 독각(獨覺)이라고도 합니다. 이승의 부분적인 깨달음은 ‘무상(無常)’을 깨닫는 일입니다. 무상은 만물이 시간과 더불어 변화, 생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과 세계를 객관시하고 세간 즉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시간과 더불어 변화, 생멸한다는 진리를 깨달아 무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이승의 경애입니다. 우리도 일상생활 속 자신을 포함한 만물이 무상의 존재임을 강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성인은 “세간의 무상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인계에 이승계가 없으리오.”(어서 241쪽)라고 하시며 인계에 이승계가 갖춰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승의 경애를 목표로 삼은 사람들은 무상에 집착하는 번뇌야말로 괴로움의 원인이라며 번뇌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해 자신의 심신(心身) 모두를 소멸시키는 그릇된 길(회신멸지<灰身滅智>)로 들어섰습니다. 이승이 얻은 깨달음은 부처의 깨달음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이며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승은 그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여 부처의 진실한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스승인 부처의 경애가 위대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들은 거기까지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겨 스스로 낮은 깨달음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또 이승은 자신의 깨달음에만 사로잡혀 타인을 구하려 하지 않는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이승의 한계입니다.
▶ 보살계
보살은 부처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이승이 부처를 스승으로 섬기기는 하지만 자신들은 부처의 경애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에 반해, 보살은 스승인 부처의 경애에 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넓혀 사람들을 구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보살의 경애의 특징은 불계라는 최고의 경애를 구하는 ‘구도’와 더불어 스스로 불도수행의 도상에서 얻은 이익을 타인에게도 나누어주는 ‘이타(利他)’의 실천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발고여락(拔苦與樂, 고를 제거하고 낙을 준다)을 실천하여 자타 함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이승이 ‘자기중심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는 것에 반해, 보살계는 ‘사람을 위해’ ‘법을 위해’라는 사명감을 갖고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이 보살계의 경애는 ‘자비’가 근본입니다.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무고(無顧)의 악인도 역시 처자를 자애하니 보살계의 일분이니라.”(어서 241쪽) 하고 말씀하십니다.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악인도 자신의 처자식을 자애하듯이 생명에는 본디 자비가 갖춰져 있습니다. 이 자비의 마음을 만인에게 베푸는 것을 삶의 근본으로 하는 것이 보살계입니다.
▶ 불계
불계는 부처가 체현한 가장 존귀한 경애입니다. 부처(불타)는 각자(覺者)라는 뜻으로 우주와 생명을 꿰뚫는 근원의 법인 묘법을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인도에서 태어난 석존(석가불) 등입니다. 또 여러 경전에 아미타여래불 등 다양한 부처가 설해져 있지만 이것은 부처의 위대한 경애를 일면에서 비유적으로 나타낸 가공의 부처입니다. 니치렌대성인은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하기 위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에 불계의 경애를 나타내고 일체중생의 성불의 길을 확립하신 말법의 어본불입니다. 불계는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묘법이라고 깨달음으로써 열리는 광대하고 복덕이 가득한 경애입니다. 이같은 경애를 연 부처는 무상(無上)의 자비와 지혜를 체현하여 그 힘으로 일체중생에게 자신과 똑 같은 불계의 경애를 얻게 하기 위한 투쟁을 지속합니다.
불계는 우리 생명에 본디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번뇌가 많은 현실생활 속에서 나타내기 어렵기 때문에 대성인은 사람들이 불계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는 방도로서 어본존을 도현하셨습니다. “니치렌의 혼을 먹물에 물들여 넣어서 썼으니 믿으실지어다…… 니치렌의 혼은 바로 남묘호렌게쿄이니라.”(어서 1124쪽)고 말씀하시듯이 어본존에게는 말법의 어본불이신 니치렌대성인의 불계 생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진수가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우리가 어본존을 믿고 자행화타에 걸친 창제에 힘쓸 때 자기 생명의 불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불계의 생명과 신심의 깊은 상관관계에 대해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말대의 범부가 출생하여 법화경을 믿음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하기 때문이니라.”(어서 241쪽) 하고 말씀하십니다. 법화경은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한 가르침인데, 그 법화경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 속에 본디 불계가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대성인의 가르침을 받아 니치칸상인은 “법화경을 믿는 마음이 강성함을 가리켜 불계라고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법화경이란 말법의 법화경인 어본존을 말하며 어본존을 끝까지 믿는 ‘강성한 신심’ 그 자체가 바로 불계입니다.
이 불계의 경애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것에도 침범당하지 않는 ‘절대적 행복경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다 제2대 회장은 신심으로 얻은 이 경애를 “살아있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는 경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불계의 경애를 자주 사자왕에 비유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자왕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