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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교학

 

  • [십계론과 일생성불] - 십계와 육도윤회

  • 관리자

  •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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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십계론과 일생성불
 
여기서는 십계론과 일생성불의 법리를 통해 신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이 금세에 자신의 생명에 갖춰진 부처의 경애를 열어 나타내는 데 있다는 것을 배우겠습니다.

▶ 십계

‘십계’는 생명의 상태와 경애를 열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관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계의 법리를 배움으로써 생명의 경애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각자 자신의 경애를 변혁하는 지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계’의 각 명칭을 열거하면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수라계, 인계, 천계, 성문계, 연각계, 보살계, 불계입니다. 이 중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을 한데 모아 ‘육도(六道)’라 하고 성문, 연각, 보살, 불을 한데 모아 ‘사성(四聖)’이라고 부릅니다.

‘육도’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인도의 세계관을 불교가 응용한 것으로, 본디는 생명이 생사를 되풀이하는 세계를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 ‘사성’은 불도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경애입니다. 법화경 이외의 경전에서는 십계는 제각각 고정화된 생명경애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그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타파하고, 십계 중에 불계를 제외한 지옥계에서 보살계까지 구계의 중생에 불계가 갖추어져 있다고 밝히고 성불한 부처의 생명에도 구계의 경애가 갖춰졌다고 설함으로써 십계는 고정적인 별개의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에 갖추어진 열 가지의 경애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십계 중 어느 일계의 모습만 나타나는 생명에도 십계가 모두 갖춰져 있으며, 연에 따라서 다른 계(界)의 경애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와 같이 십계의 각계가 서로 십계를 갖추고 있는 것을 십계호구(十界互具)라고 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정토라 함도 지옥이라 함도 밖에는 없느니라. 오직 우리들의 가슴속에 있느니라. 이것을 깨달음을 부처라 하고 이에 미혹함을 범부라 하며.”(어서 1504쪽) <통해: 부처의 깨끗한 국토라 해도 지옥이라 해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을 부처라 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미혹하는 것을 범부라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에 십계가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지옥의 고통스러운 경애라 해도 불계라는 대환희의 생명으로 변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법화경에 입각한 십계론은 자신의 생명경애를 역동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원리가 됩니다.

그럼 십계 각각의 경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 생명에 갖춰진 육도에 대해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자주 타면(他面)을 보건대 어느 때는 기뻐하고 어느 때는 노하며, 어느 때는 평온하고 어느 때는 탐(貪)을 나타내며, 어느 때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어느 때는 첨곡이니라. 노함은 지옥, 탐함은 아귀, 어리석음은 축생, 첨곡함은 수라, 기뻐함은 천, 평온함은 인이니라.(어서 241쪽)
이 어문을 토대로 육도의 하나하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지옥계
 
지옥은 본디는 ‘지하의 감옥’이라는 뜻으로, 경전에는 팔열지옥, 팔한지옥 등 수많은 지옥이 설해져 있습니다. 지옥계는 고통에 사로잡힌 가장 낮은 경애입니다. ‘지(地)’는 최저를 의미하고 ‘옥(獄)’은 구속되어 얽매인 부자유스러움을 나타냅니다. “지옥은 무서우니 불길을 가지고 집으로 삼는다.”(어서 1439쪽)라고 말씀하시듯 지옥계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마치 불길처럼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세계로 느끼는 경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대성인은 <관심의 본존초>에서 “노함은 지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노함’은 뜻대로 되지 않는 자기자신이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주변 세계에 대해 품는 해소할 길 없는 원한의 마음입니다. 고통스러운 세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생명의 신음소리가 바로 이 ‘노함’입니다. 이른바 ‘사는 것 자체가 괴롭다’ ‘무엇을 봐도 불행하게 여겨진다.”는 경애가 지옥계입니다.
 
▶ 아귀계
 
아귀계는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경애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아귀의 본디 의미는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죽은 자가 늘 굶주려 음식을 바라고 있다는 데서 멈출 줄 모르는 강한 욕망의 불길에 몸도 마음도 불태우는 생명 상태를 아귀계라고 표현합니다.
대성인은 “탐함은 아귀” 또 “아귀는 슬프니라. 기갈로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고.”(어서 1439쪽)라고 말씀하십니다. 굶주려 아이까지 잡아먹을 정도의 탐욕, 즉 끝없는 욕망에 휘둘리고 그 때문에 마음이 자유롭지 못해 고통을 낳는 경애를 말합니다. 물론 욕망 그 자체에는 선악의 양면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식욕 같은 욕망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욕망이 인간을 진보, 향상시키는 에너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창조의 방향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괴로워하는 것이 아귀계입니다.
 
▶ 축생계
 
축생이란 말은 본디 짐승이나 새 같은 동물을 가리킵니다. 축생계의 특징은 눈앞의 이해에 사로잡혀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대성인은 “어리석음은 축생”이라고 설합니다. 인과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정사, 선악의 판단에 미혹하여 눈앞의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또 “축생의 마음은 약함을 위협하고 강함을 두려워하느니라.”(어서 957쪽), “축생은 잔해(殘害)라 해서 서로 살육한다.”(어서 1439쪽)고 말씀하듯이 축생계의 생명은 이성과 양심을 망각한 채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까지 해치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경애입니다. 눈앞의 일밖에 보이지 않아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켜 고통스러워합니다. <축생이라는 표현은 고대 인도의 표현을 답습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동물이라 해도  맹인안내견과 같이 사람을 돕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예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인간이라 해도 전쟁과 같이 다른 동물보다 훨씬 잔혹한 행위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의 셋은 모두 고뇌의 경애이므로 ‘삼악도(三惡道)’라고 부릅니다.
 
▶ 수라계

수라는 본디 아수라(阿修羅)라고 하여 싸움을 좋아하는 고대 인도의 신(神)의 이름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여 늘 타인을 이기려는 ‘승타(勝他)의 염<念>)’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해 자신이 뛰어나고 타인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만심(慢心)을 일으켜 남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타인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타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또 참으로 자신보다 강한 것을 만났을 때는 비굴해져서 아첨하게 됩니다. 자신을 어떻게든 뛰어나게 보이려고 허상을 만들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인격자나 선량한 사람으로 꾸며 겸허한 척 보이려고 하지만, 내면은 자기보다 뛰어난 것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처럼 내면과 외면이 서로 달라  마음에 겉과 속이 있는 것도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첨곡함은 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첨곡’은 자신의 본심을 감추고 상대에 영합하는 것입니다. ‘첨’은 ‘아첨하다, 속이다’라는 의미이고 ‘곡’은 ‘도리를 굽혀 따른다’는 뜻입니다.
수라계는 탐진치(貪瞋癡)의 삼독(三毒,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근본적인 번뇌)에 휘둘리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와 달리 자신의 의사로 행동을 정하는 만큼 삼악도를 뛰어 넘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고통을 수반하는 불행한 경애이기 때문에 삼악도에 수라계를 더해 ‘사악취(四惡趣)’라고 합니다.
 
▶ 인계
 
인계는 온화하고 평온한 생명상태이며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경애를 말합니다. 대성인은 “평온함은 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인계의 특질은 인과의 도리를 알고 사물의 선악을 비판하는 이성의 힘이 명확하게 작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성인은 “현명함을 사람이라 하며 어리석음을 축이라 하느니라.”(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판별하는 힘을 지니고 자기조절을 할 수 있게 된 경애입니다. 이 인간다운 경애도 결코 노력 없이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악연이 많은 세간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향상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인계는 ‘자신을 이기는’ 경애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인계의 생명은 ‘성도정기(聖道正器)’라고 하며 불도(성도)를 이룰 수 있는 그릇이라고 여깁니다. 인계는 악연을 접하여 악도에 떨어질 위험성도 있는 반면, 수행에 힘씀으로써 사성(四聖)의 길을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천계
 
천계의 ‘천(天)’은 본디 고대 인도에서는 지상의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닌 신들을 말하며, 그들이 사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금세에 선한 행위를 한 사람은 내세에는 천에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법에서는 천계를 생명 경애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노력한 결과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환희의 경애입니다. 대성인은 “기뻐함은 천”(어서 241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욕망이라고 해도 다양합니다. 수면욕이나 식욕과 같은 본능적인 욕망, 새로운 차나 집을 갖고 싶어하는 물질적인 욕망, 회사에서 지위나 명예를 얻고자 하는 사회적 욕망,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 싶어 하는 정신적 욕망 등이 있습니다. 이들 다양한 욕망이 충족되어 환희로 가득 찬 경애가 천계입니다. 그러나 천계의 기쁨은 영속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계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진정한 행복경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