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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강창섭 ‘미산교복’ 대표

“좋은 교복이란 자기에게 딱 맞는 옷입니다. 여러 사람 것을 주문 제작 한다고 해서 대충 만들면 안 됩니다. ‘한 사람만을 위한 교복’을 만드는 것이 저의 교복 제작 철학입니다.”



 





‘몸이 아니라 마음에 맞추는 교복을 만들겠다’는 정성으로 교복을 주문제작하는 강창섭 씨.



‘교복이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소재나 디자인에서 큰 차이가 있다. 상·하의 구김이 적은 소재, 셔츠가 바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실리콘 밴드 처리, 소매와 목 부분에 때가 타지 않도록 한 패브릭 처리 등 실용성을 높여야 소비자에게 선택을 받을 수 있다. 멋스러운 단추·실의 색깔, 안감 디자인 등 디테일도 천차만별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같은 값이면 그렇게 ‘잘 빠진’ 교복을 입길 원한다.

1979년부터 전북 군산시에서 ‘미산교복’을 운영하고 있는 강창섭 씨.

그는 전북 내 학교는 물론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교복을 주문생산하고 있다. 오랫동안 좋은 소재와 예쁜 디자인으로 신뢰를 쌓은 ‘미산교복’에서 강창섭 씨를 만났다.



-. 교복을 직접 디자인하신다고요.

“제 나이가 아직 일흔하고도 아홉밖에 되지 않았어요(웃음). 지금까지 교복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늙지 말자.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디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복도 유행이 있어요. 어느 때는 타이트하게 입고, 어느 때는 나팔바지처럼 크게 입고요. 그런데 40년을 해보니까 유행이란 것이 시대에 맞춰 돌고 돌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디자인했던 노트와 메모를 버리지 않고 있어요. 언제 다시 유행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죠.”



-.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교복점도 주변에 많은데요.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르지만, 현재 전북시내 학교의 교복은 업체별로 각 학교에 찾아가서 학부모, 학생에게 상품설명회를 하고 평가 점수로 낙찰을 받게 되는 시스템입니다. 저도 직접 강단 위에 올라가 ‘미산교복’의 상품을 설명하죠.

대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일은 당연지사라 큰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명 아이돌 가수를 교복모델로 쓰는 대기업과 경쟁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거품을 뺀 가격으로 승부를 걸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전북에서도 손꼽히는 매출을 꾸준히 올리는 것을 보면서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어요. 결국, 합리적인 가격과 더불어 최고의 원단이라면 대기업도 경쟁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상품설명회에서 기립박수까지 받으셨는데, 그 비결이 있다면요.

“좋은 교복이란 자기에게 딱 맞는 옷입니다. 여러 사람의 것을 제작한다고 해서 대충 만들면 안 됩니다. ‘한 사람만을 위한 교복’을 만드는 것이 저의 교복 제작 철학입니다.

50년 전, 선배들이 기술을 가르쳐주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했던 말이 있습니다. ‘몸에다가 옷을 맞추지 마라’는 것이에요. ‘입는 사람의 마음에 맞추는 옷’이 진짜 좋은 옷이라고 배웠습니다. 입을 때마다 자기에게 잘 맞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40년 동안 교복을 만들면서 ‘사람의 몸보다 마음에 맞는 옷’을 만들겠다는 바람. 그 마음이 오랫동안 최고의 교복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설명회에서 말하니, 학생과 학부모들이 일어서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학부모가 찾아와서 ‘제가 중학교 때 입었던 교복이 미산교복이에요. 우리 딸까지 미산교복을 입겠네요. 꼭 이곳이 되도록 기도할 겁니다’라는 말을 하시더라고요. 아, 그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뭐라 말로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죠. 한우물만 파왔던 제 인생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았어요.”



-. 어떤 계기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먹고살려면 기술을 배워야 했어요. 제게 주어진 선택은 세 가지가 있었어요. 이발소, 식당, 양복점이었죠. 1960년대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대부분 선택해야 할 일이었겠죠. 저는 양복기술을 택했어요. 양복을 주문제작하던 일이었죠. 그때, 봉제기술을 하고 있던 아내를 만났어요. 아내와 함께 양복점을 하다가 교복제작으로 자연스럽게 바꾸게 됐어요. 그때는 정신없을 정도로 잘 됐어요. 그러다 1982년, 교복 자율화 조치가 되면서 큰 위기를 맞았어요. 그래서 슈퍼마켓도 운영하게 됐고, 숙박업도 했어요. 그런데 정말 적성과 맞지 않더군요. 교복점에서 일할 때는 생각 못 했는데, 갑작스레 다른 일을 하니 ‘옷 만드는 일이 나의 천직이었구나’ 하고 느꼈어요. 1990년대 이후 학교장 재량에 따라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복을 선택하는 추세로 변하고, 다시 제가 바라던 옷을 마음껏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행복했어요.”



그의 가게 한 켠에는 타이어가 닳고 닳은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자전거로 하루에 70km를 달린다고 한다. 체력이 되어야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0대 같은 근육과 피부는 누가 봐도 그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밟는 자전거 페달은 청년 못지않게 빠르고 힘차다. 그는 오직 앞만 보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 긍정적인 성격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게 건강의 첫 번째 비결이에요. 아내가 저에게 ‘푼수’라고 놀리기까지 합니다. 스트레스를 되도록 받지 않으려고 하죠. 신심(信心)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닥친 이 어려움은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기에 낙천적일 수 있는 겁니다. 신심을 하기 전에는 소심하고, 걱정도 많고, 두려움이 많았던 성격이었어요. 요즘 소설 ‘신·인간혁명’을 1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예전과 느낌이 또 다르더군요. 불법철학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요.

“소설 ‘신·인간혁명’ 제30권 <자복>에서 선생님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건강합니다! 자, 출발합시다’라고 사자후하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결의를 했습니다. 나도 반드시 2020년 청년 10만 국사 구축에 선구로 나서 광선유포 하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힘이 닿는 한 삼대(三代)가 ‘미산교복’을 입을 수 있도록 건강하고 왕성하게 일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입니다.

앞으로도 교복 뒤에 ‘미산교복’이라는 라벨이 부끄럽지 않게 지역사회에서도 신뢰를 받으며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겠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날 얼굴을 맞대고 몸과 마음으로 보여줘야만 신용을 얻을 수 있다. 그가 외길로 달려온 40년은 순간순간이 자신과의 싸움이고 투쟁이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에 맞추는 교복을 만들겠다’는 정성이 있었기에, 어머니에서부터 딸까지 그가 만든 교복을 입는 것이 아닐까.



·익산권 副지구부장



김기수(kimks@) | 화광신문 : 19/04/19 13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