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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교학

 

  • [세계광포와 창가학회] - 창가학회의 역사(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

  • 관리자

  • 201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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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

도다 선생님은 1945년 7월 3일, 2년간의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출옥합니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홀로 일어나 괴멸상태였던 학회 재건에 바로 착수하셨습니다. 먼저 교육개혁뿐만 아니라 광선유포라는 전 민중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목표로 하는 학회의 목적에 입각한 학회의 명칭을 ‘창가학회’라고 개명하고 좌담회와 지방절복도 재개합니다.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의 만남
 
1947년 도다 선생님과 제3대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이 사제로서 만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1928년 1월 2일, 현재 도쿄도 오타구 오모리기타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세살 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점점 전황이 악화하는 속에 한창 일할 나이인 형 네명이 모두 징병으로 끌려가게 되어 이케다 선생님은 집안을 보살피며 군수공장에서 일하지만 이 무렵부터 결핵을 앓아 생사 문제를 생각하며 고뇌하는 청춘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쟁터에서 일시 귀국한 큰형에게 들었던, 전쟁으로 아시아 민중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말과, 공습으로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전쟁의 모순과 비참함을 통감합니다. 특히 큰형을 잃고 슬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악을 실감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문학이나 철학서적을 통해 확고한 인생을 모색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케다 선생님은 1947년 8월 14일, 처음으로 창가학회 좌담회에 참석해 그 자리에서 인생의 스승인 도다 선생님을 만납니다.
이날, 도다 선생님은 <입정안국론>을 강의하셨습니다. 강의가 끝난 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에게 “올바른 인생이란” “진정한 애국자란” “남묘호렌게쿄란” “천황에 대해” 잇달아 질문했습니다. 군부정부와 싸우며 2년간의 옥중투쟁을 관철한 도다 선생님의 깊은 신념이 맥동하고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답변에 이케다 선생님은 ‘이 사람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 1947년 8월 24일, 창가학회에 입회합니다. 도다 선생님이 마흔일곱살, 이케다 선생님이 열아홉살 때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 이듬해 다이세이학원(현 도쿄후지대학) 야간부에 입학합니다. 9월에는 도다 선생님의 법화경 강의를 들으며 불법연찬을 심화하는 속에 도다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광선유포에 꿋꿋이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또 1949년 1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입사해 소년잡지 편집에 종사합니다.
 
사제공전으로 학회재건
 
1949년 7월에는 창가학회 기관지로서 새롭게 ‘대백연화’가 탄생합니다. 그 창간호에 도다 선생님은 논문 ‘생명론’을 집필하셨습니다.
이윽고 도다 선생님의 사업은 혼란한 경제의 영향으로 곤경에 처해 이듬해 1950년 8월 24일, 도다 선생님은 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할 의향을 발표합니다.
이때 “앞으로 저의 스승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고생만 시켰지만 자네 스승은 나일세.” 하고 사제의 유대를 확인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 사업의 잔무정리 등으로 뛰어다니면서 궁지를 타개하여 반드시 도다 선생님을 학회 회장으로 모시겠다고 깊이 결의합니다.
스승을 돕기 위해 야학을 단념한 이케다 선생님에게 도다 선생님은 개인교수로 대학 교육보다 뛰어난 만반의 학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개인교수는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시기 전까지 이어져 ‘도다대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이러한 악전고투 속에서도 도다 선생님은 언제나 곁에 있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광포의 언론전을 위한 기관지 발간과 소카대학교의 설립과 같은 미래의 구상을 말했습니다. 세이쿄신문도 소카대학교도 이 사제의 대화에서 탄생했습니다.
 
제2대 회장 취임
 
1951년 5월 3일, 어려운 고비를 이겨낸 도다 선생님은 많은 회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2대 회장에 취임합니다. 그 인사말에서 75만 세대 절복을 달성하겠다는 서원을 선언합니다. 당시 학회원은 실질적으로 약 3000명 정도. 누구도 믿지 못할 홍교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은 회장 취임 전후에 지부체제를 정비하고 광선유포를 위한 포진을 새롭게 했습니다.
회장 취임 직전인 4월 20일에는 기관지 ‘세이쿄신문’이 창간되고 도다 선생님은 창간호부터 묘오공(妙悟空)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인간혁명≫을 집필, 연재했습니다.
‘인간혁명’은 니치렌대성인불법을 실천하여 각자가 자신의 생명 경애를 변혁하고 전 인류의 숙명전환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도다 선생님은 생명론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혁명의 이념을 내걸고 대성인불법을 현대에 전개하셨습니다.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곧바로 부인부를 비롯한 남자부, 여자부 등 각부 조직을 잇달아 결성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이듬해 1952년 초두. 가마타지부의 지부간사로 임명된 이케다 선생님은 2월 한달 동안에 지부에서 201세대의 홍교를 추진, 당시 홍교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2월 투쟁)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학회 전체의 홍교에 가속도가 붙어 전진이 시작됩니다.
한편 도다 선생님은 어서전집 발간에도 착수하십니다. 광선유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어서의 연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종문의 석학이신 니치코상인에게 편찬을 의뢰하여 1952년 4월, 입종 700년의 가절을 맞아 ≪니치렌대성인 어서전집≫을 발간합니다. 이 어서전집을 한사람 한사람이 진지하게 연찬함으로써 어서근본의 정신이 더욱 학회 전체에 확립됩니다.
 
권력의 마성이 준동
 
학회는 민중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위해 투쟁하신 니치렌대성인의 ‘입정안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부패한 정치를 정화하고 정치를 민중의 손에 되돌려주기 위해 1955년 4월에 실시된 통일지방선거에서 최초로 독자적으로 추천한 후보를 내세웠습니다. 이듬해 1956년,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에서 비약적인 절복을 추진해 5월에는 오사카지부가 1만 1111세대라는 미증유의 홍교를 달성. 또 7월에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지원활동의 책임을 맡은 오사카 지방구에서 당선이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지지한 후보자가 당선합니다. 일반신문에서도 “‘설마’가 실현”이라는 표제를 내걸 정도로 멋진 승리였습니다.
이 선거에서 학회가 추천한 참의원이 세명 탄생합니다. 이 무렵부터 창가학회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지닌 단체로 주목받기 시작하고 동시에 여러 기성세력의 부당한 압력이 가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탄압에 맞서 이케다 선생님은 학회원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싸웠습니다. 홋카이도의 유바리 탄광노조가 신교의 자유를 짓밟고 학회원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1957년 6월, 곧바로 현지로 달려가 탄광노조에 단호히 항의하며 사건해결을 위해 분투했습니다.(유바리 탄광노조사건)
그 직후 7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 부경에 부당하게 체포됩니다.(오사카사건)
이것은 같은 해 4월에 실시된 참의원 오사카지방 선거구 보궐선거에서 선거위반자가 나온 것과 관련하여 이케다 선생님을 사건의 주모자로 내세워 사실무근한 죄를 덮어씌우려 한 사건입니다.
이 7월 3일은 1945년 도다 선생님이 출옥한 날과 같은 날이며 이케다 선생님은 훗날 “출옥과 입옥의 날에 사제 있노라” 하고 읊으셨습니다.
15일 동안에 걸친 가혹한 취조에서 검찰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도다 회장을 체포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미 도다 선생님의 몸은 쇠약한 상태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을 지키기 위해 일단은 죄를 뒤집어쓰고 그 후 재판에서 결백을 증명하기로 결단하고 7월 17일에 오사카구치소에서 석방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로부터 4년 반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1962년 1월 25일에 무죄가 선고됩니다.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이 판결은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광선유포의 후계를 맡기다
 
1957년 9월 8일, 도다 선생님은 창가학회 평화운동의 기조가 되는 ‘원수폭 금지 선언’을 발표하십니다.
이 선언에서는 불법의 생명존엄의 원리에서 핵무기를 인류의 생존권을 빼앗는 ‘마(魔)’의 산물이라고 포착, 핵무기 사용을 절대악으로서 단죄합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도다 선생님이 서원하신 75만 세대 홍교를 달성합니다.
이듬해 1958년 3월에는 학회가 다이세키사에 건립, 기진한 대강당이 완성됩니다. 3월 16일에는 청년부 6000명에게 광선유포의 일체를 맡기는 의식이 열리는 자리에서 도다 선생님은 “창가학회는 종교계의 왕자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도다 선생님이 후계의 청년, 그 중에서도 이케다 선생님에게 광선유포의 대원을 맡기신 이 ‘3・16’은 훗날 ‘광선유포기념일’이 됩니다.
1958년 4월 2일, 도다 선생님은 모든 원업을 이루시고 향년 58세로 서거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 오달을 원점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광선유포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