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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형제의 사이가 불화(不和)해지지 마실지어다, 불화해지지 마실지어다”(효자어서 1100쪽)
허경
2016-08-10
3,350
“형제의 사이가 불화(不和)해지지 마실지어다, 불화해지지 마실지어다”(효자어서 1100쪽)
한국의 조직은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절복으로 인한 인간관계로 조직이 만들어지고 활동도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협의를 거듭하여 책임자와 부책임자를 정한 적도 있었지만, 모두가 단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학회본부의 기본 방침을 바탕으로 조직을 운영하기로 결정해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간부도 있었다. 결국 결속하지 못하고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뉜 채로 조직은 운영되어 갔다.
동지들 한 사람 한사람은 순수하고 구도심도 또한 강했다.
그러나 어떤 그룹에서는 멤버들의 이와 같은 순수한 신심을 간부의 야심을 위해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중심자가 자신을 위한 공양까지도 끌어 모으려고까지 했다. 나중에 이 그룹의 간부는 학회를 배반하고 멀어지게 된다.
1973년과 1974년 무렵,한국에는 크게 나뉘어 세 개의 그룹이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1975년 1월 26일, 전 세계 51개국·지역의 대표가 괌에 모여 SGI(창가학회 인터내셔널)를 발족했다. 인류의 행복과 평화의 실현을 위해 세계광포의 새로운 출발이 개시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간부는 마음을 하나로 합치지 못하여 그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의식에 대표를 내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다. 일부 간부가 자기류의 신심에 빠져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버린 결과였다.
바로 거기에 확고한 지도 원리와 법을 중심으로 한 엄정한 광선유포의 스승이라는 존재가 불가결한 이유가 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SGI가 발족하는 자리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또 오랜 시련을 참고 끝까지 견디며 한국의 최일선에서 뛰는 동지들을 생각하니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신이치는 한국의 멤버가 사이좋게 단결하여 존귀한 사명이 있는 불자로서 서로 존경하며 전진해 가기 위해, 이 때 한국의 동지들의 격려와 상담역을 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이사장이었던 주조 기요시와 부이사장 이즈미다 히로시가 그 상담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976년 5월, 한국의 멤버는 몇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서울에서 전국대표자회의를 열어 ‘불교회’를 발족시켰다. 거기서 아홉 명의 운영위원이 결정되었고 그 중에서 세 명을 의장단으로 선출했다.
‘삼인의장제(三人議長制)’라는 형태이긴 했지만 마침내 한국 전체를 통합하는 조직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한국의 동지는 수많은 풍설(風雪)을 겪어야 했다. 정법에 위배하여 분파(分派)해 간 사람도 있었다. 종문의 파계승이나 일본의 반역자가 조직을 교란시키기 위해 이면에서 책동한 적도 있었다. (중략)
그러나 그 때마다 오히려 신앙의 순도(純度)는 높아져 갔다. 조직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탐하려 한 자들이나 자기 멋대로 하는 간부는 도태된 것이다.
그리고 조국의 평화와 번영을 구축하는 ‘동심(同心)’의 대하(大河)라고도 할 수 있는 오늘날의 한국SGI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중략)
한편 야마모토 신이치도 한국의 경애하는 동지들의 행복과 활약을 염원하여 나날이 ‘공덕의 비여, 쏟아져라!’고 계속해서 제목을 보냈다.
또 한국의 동지들이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장 먼저 만나 한 사람 한사람 포옹하는 듯한 마음으로 전혼을 담아 격려했다. 또한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신의와 우정의 영원한 ‘보배의 다리’를 놓고자 문화와 교육의 교류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0년 가을에 도쿄후지미술관 소장의 ‘서양회화명품전’이 서울에서 개최되기에 이른다.
신이치는 도쿄후지미술관의 창립자로서 그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 때 오랫동안 염원해 온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1998년 5월 신이치는 또다시 한국땅에 발을 내딛었다.
소카대학 창립자로서 명문 경희대학의 초청을 받아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신이치의 ‘세계평화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한일우호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치하하여 수여된 것이었다.
이 한국방문 중이었던 5월 18일, 신이치는 서울에 있는 한국SGI 본부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상쾌했다.
동지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1964년에 저 시련의 폭풍우가 휩쓸고 간 이후로 34년 동안 멤버들은 이 날이 오기를 염원하며 기원하고 학수고대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신이치도 마찬가지였다.
신이치는 한국의 ‘신심의 대영웅’들에게 만감을 담아 호소했다.
“여러분들이 계시면 일체를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엄연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승리했습니다!”
환희에 넘친 대박수가 일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인간성을 넓혀 간다. 21세기의 불법르네상스는 한국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나는 기쁩니다. 전 세계가 여러분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전 생명을 쏟듯이 신이치는 이야기했다.
“아무쪼록 ‘즐거운 인생’을! ‘위대한 인생’을! ‘승리의 인생’을!”
모두 울고 있었다. 모두 대환희에 감싸여 있었다. 그리고 모두 새로운 여정에 대한 맹서로 불타고 있었다.
폭풍우를 견뎌 낸 수목(樹木)의 생기 넘치는 선명한 초록의 영관(榮冠)이 그 빛을 발한다. 어려움을 극복한 한국 동지들의 가슴에는 21세기를 비추는 황금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신.인간혁명 8권 격류)
한국의 조직은 각 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절복으로 인한 인간관계로 조직이 만들어지고 활동도 각각 독자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협의를 거듭하여 책임자와 부책임자를 정한 적도 있었지만, 모두가 단결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학회본부의 기본 방침을 바탕으로 조직을 운영하기로 결정해도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간부도 있었다. 결국 결속하지 못하고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뉜 채로 조직은 운영되어 갔다.
동지들 한 사람 한사람은 순수하고 구도심도 또한 강했다.
그러나 어떤 그룹에서는 멤버들의 이와 같은 순수한 신심을 간부의 야심을 위해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중심자가 자신을 위한 공양까지도 끌어 모으려고까지 했다. 나중에 이 그룹의 간부는 학회를 배반하고 멀어지게 된다.
1973년과 1974년 무렵,한국에는 크게 나뉘어 세 개의 그룹이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1975년 1월 26일, 전 세계 51개국·지역의 대표가 괌에 모여 SGI(창가학회 인터내셔널)를 발족했다. 인류의 행복과 평화의 실현을 위해 세계광포의 새로운 출발이 개시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간부는 마음을 하나로 합치지 못하여 그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의식에 대표를 내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다. 일부 간부가 자기류의 신심에 빠져 ‘자기중심적’으로 되어 버린 결과였다.
바로 거기에 확고한 지도 원리와 법을 중심으로 한 엄정한 광선유포의 스승이라는 존재가 불가결한 이유가 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SGI가 발족하는 자리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또 오랜 시련을 참고 끝까지 견디며 한국의 최일선에서 뛰는 동지들을 생각하니 애처로워 견딜 수 없었다.
신이치는 한국의 멤버가 사이좋게 단결하여 존귀한 사명이 있는 불자로서 서로 존경하며 전진해 가기 위해, 이 때 한국의 동지들의 격려와 상담역을 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리고 당시 이사장이었던 주조 기요시와 부이사장 이즈미다 히로시가 그 상담자가 되었다.
이듬해인 1976년 5월, 한국의 멤버는 몇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서울에서 전국대표자회의를 열어 ‘불교회’를 발족시켰다. 거기서 아홉 명의 운영위원이 결정되었고 그 중에서 세 명을 의장단으로 선출했다.
‘삼인의장제(三人議長制)’라는 형태이긴 했지만 마침내 한국 전체를 통합하는 조직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도 한국의 동지는 수많은 풍설(風雪)을 겪어야 했다. 정법에 위배하여 분파(分派)해 간 사람도 있었다. 종문의 파계승이나 일본의 반역자가 조직을 교란시키기 위해 이면에서 책동한 적도 있었다. (중략)
그러나 그 때마다 오히려 신앙의 순도(純度)는 높아져 갔다. 조직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탐하려 한 자들이나 자기 멋대로 하는 간부는 도태된 것이다.
그리고 조국의 평화와 번영을 구축하는 ‘동심(同心)’의 대하(大河)라고도 할 수 있는 오늘날의 한국SGI로 발전해 갔던 것이다. (중략)
한편 야마모토 신이치도 한국의 경애하는 동지들의 행복과 활약을 염원하여 나날이 ‘공덕의 비여, 쏟아져라!’고 계속해서 제목을 보냈다.
또 한국의 동지들이 일본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장 먼저 만나 한 사람 한사람 포옹하는 듯한 마음으로 전혼을 담아 격려했다. 또한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신의와 우정의 영원한 ‘보배의 다리’를 놓고자 문화와 교육의 교류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90년 가을에 도쿄후지미술관 소장의 ‘서양회화명품전’이 서울에서 개최되기에 이른다.
신이치는 도쿄후지미술관의 창립자로서 그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 때 오랫동안 염원해 온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리고 1998년 5월 신이치는 또다시 한국땅에 발을 내딛었다.
소카대학 창립자로서 명문 경희대학의 초청을 받아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신이치의 ‘세계평화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과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한일우호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치하하여 수여된 것이었다.
이 한국방문 중이었던 5월 18일, 신이치는 서울에 있는 한국SGI 본부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초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상쾌했다.
동지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1964년에 저 시련의 폭풍우가 휩쓸고 간 이후로 34년 동안 멤버들은 이 날이 오기를 염원하며 기원하고 학수고대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신이치도 마찬가지였다.
신이치는 한국의 ‘신심의 대영웅’들에게 만감을 담아 호소했다.
“여러분들이 계시면 일체를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엄연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승리했습니다!”
환희에 넘친 대박수가 일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인간성을 넓혀 간다. 21세기의 불법르네상스는 한국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나는 기쁩니다. 전 세계가 여러분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전 생명을 쏟듯이 신이치는 이야기했다.
“아무쪼록 ‘즐거운 인생’을! ‘위대한 인생’을! ‘승리의 인생’을!”
모두 울고 있었다. 모두 대환희에 감싸여 있었다. 그리고 모두 새로운 여정에 대한 맹서로 불타고 있었다.
폭풍우를 견뎌 낸 수목(樹木)의 생기 넘치는 선명한 초록의 영관(榮冠)이 그 빛을 발한다. 어려움을 극복한 한국 동지들의 가슴에는 21세기를 비추는 황금의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신.인간혁명 8권 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