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조성규 - 조한의원 운영
조성규 조한의원 운영
이웃 아픔 함께하며 황혼 빛 물들인다
30여년 한약 도매상 운영하며 불우이웃 위해 봉사
착실한 학회 사명으로 2대서 한의원 개원 꿈 이뤄!
“열심히 사는 게 최고 건강 관리지요. 젊어서 술에 찌들어 힘들었던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아파서 드러누워 본 적은 없어요. 이 모든 것이 신심(信心) 덕분이지요.”
전남 순천시 풍덕동에 있는 조한의원을 운영하는 조성규(72)씨. 아들 조준(28) 원장은 진료를 맡고 자신은 한약 관리를 맡아 날마다 일과 씨름한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건강은 걱정 없다면서 당당히 현역으로 활동한다.
조준씨는 “아버지는 날마다 환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세요. 환자들 안부도 물어보시고 건강 상담도 해주셔서 늘 든든해요”라며 부친의 존재가 한의원 운영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조한의원은 노인성 질환 환자가 많은 편이고, 근골격계 질환을 중점적으로 치료한다.
그는 평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토요일은 오후 4시까지 일한다. 하루에 한의원에서 맞이하는 환자는 평균 50명. 그는 조 원장의 진료와 처방에 따라 약재실에 있는 수 십 가지 약재들을 빈틈없이 관리한다.
그가 한약과 인연을 맺은 지는 아주 오래됐다. 2004년 5월에 한의원을 개원하기 전까지 여수에서 30년 가까이 한약 도매상을 운영했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 한약방에서 몇 년간 일한 적이 있다. 그때 한약방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어깨 너머로 한약 관리와 침술을 배웠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30대 후반에 자신만의 한약 도매상을 열었다.
“젊어서 다른 일도 해봤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약 도매상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 않아 술에 찌들어 살기도 했어요. 다행히 그때 여동생이 신심(信心)을 권유했고, 차츰 불법(佛法)의 힘을 알게 되면서 한약 도매상이 날로 번창했어요.”
그는 한의사 면허증만 없을 뿐 한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훤하다. 30년간 숱한 사람들이 그에게 한약을 사먹고 건강을 되찾았다. 아들 조준씨도 그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한약과 친숙했고, 결국 그의 기원과 바람대로 한의사가 됐다.
“수 십 년간 한약 도매상을 하면서 꼭 한의원을 열고 싶었어요. 한이 맺혔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래도 학회를 지키면서 광선유포를 위해서 맡은 사명을 다하니 아들이 순수하게 따라줘서 한의원을 개원할 수 있었어요. 아들이 참 고맙고 대견하지요.”
한약 도매상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것은 2000년 5월 광주에서 열린 새천년문화체육대회에서 자원봉사를 펼친 일이다. 이때 그는 한달 동안 쉴새 없이 여수와 광주를 오가며 자원봉사를 했다. 광주에서 부상한 출연진을 돌봐주고 여수에 돌아오면 늘 자정이 지났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신바람 나게 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한의원을 운영하며 3가지 원칙을 꼭 지킨다.
첫째, 환자들의 속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흔히 배가 아파도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환자의 속성을 잘 헤아려서 약을 써야만 제대로 효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돈을 벌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약을 다루는 사람은 돈에 관심을 두어서는 절대로 환자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픈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한다는 점이다. 치료하는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껴야 정확한 처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의원 개원 후 어려움도 많았다. 특히 최근 2년 동안 아들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계약직 한의사를 채용하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한의사가 3차례나 바뀌면서 환자가 차츰 줄어들었고 한의원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는 창제로 승부를 걸었다. 날마다 창제 목표를 세워 도전했고, 한의원에서도 틈나는 대로 창제를 계속했다. 그러자 아들이 뜻하지 않게 일찍 전역했다.
또 부자가 성심성의를 다해 환자를 맞이하고 차곡차곡 신뢰를 쌓으면서 지금은 풍덕동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지금 되돌아 보면 살아 있는 자체가 체험이고 공덕이지요.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생길 때마다 열심히 창제를 하면서 잘 이겨온 것 같아요. 앞으로는 광선유포에 전념하고 싶어요.”
그는 남은 여생 동안 광포를 위해 더욱 땀 흘리는 한편, 자신의 한의학 지식을 활용해 몸이 아픈 이웃을 도우며 살고 싶다면서 여유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순천권 순천지역 총합부지역장
장호정(hjjang@hknews.co.kr) | 화광신문 : 07/10/26 754호 발췌
조성규 조한의원 운영
이웃 아픔 함께하며 황혼 빛 물들인다
30여년 한약 도매상 운영하며 불우이웃 위해 봉사
착실한 학회 사명으로 2대서 한의원 개원 꿈 이뤄!
“열심히 사는 게 최고 건강 관리지요. 젊어서 술에 찌들어 힘들었던 적은 있지만 지금까지 아파서 드러누워 본 적은 없어요. 이 모든 것이 신심(信心) 덕분이지요.”
전남 순천시 풍덕동에 있는 조한의원을 운영하는 조성규(72)씨. 아들 조준(28) 원장은 진료를 맡고 자신은 한약 관리를 맡아 날마다 일과 씨름한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건강은 걱정 없다면서 당당히 현역으로 활동한다.
조준씨는 “아버지는 날마다 환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세요. 환자들 안부도 물어보시고 건강 상담도 해주셔서 늘 든든해요”라며 부친의 존재가 한의원 운영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조한의원은 노인성 질환 환자가 많은 편이고, 근골격계 질환을 중점적으로 치료한다.
그는 평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토요일은 오후 4시까지 일한다. 하루에 한의원에서 맞이하는 환자는 평균 50명. 그는 조 원장의 진료와 처방에 따라 약재실에 있는 수 십 가지 약재들을 빈틈없이 관리한다.
그가 한약과 인연을 맺은 지는 아주 오래됐다. 2004년 5월에 한의원을 개원하기 전까지 여수에서 30년 가까이 한약 도매상을 운영했다.
어린 시절에는 동네 한약방에서 몇 년간 일한 적이 있다. 그때 한약방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어깨 너머로 한약 관리와 침술을 배웠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30대 후반에 자신만의 한약 도매상을 열었다.
“젊어서 다른 일도 해봤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약 도매상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 않아 술에 찌들어 살기도 했어요. 다행히 그때 여동생이 신심(信心)을 권유했고, 차츰 불법(佛法)의 힘을 알게 되면서 한약 도매상이 날로 번창했어요.”
그는 한의사 면허증만 없을 뿐 한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훤하다. 30년간 숱한 사람들이 그에게 한약을 사먹고 건강을 되찾았다. 아들 조준씨도 그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한약과 친숙했고, 결국 그의 기원과 바람대로 한의사가 됐다.
“수 십 년간 한약 도매상을 하면서 꼭 한의원을 열고 싶었어요. 한이 맺혔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그래도 학회를 지키면서 광선유포를 위해서 맡은 사명을 다하니 아들이 순수하게 따라줘서 한의원을 개원할 수 있었어요. 아들이 참 고맙고 대견하지요.”
한약 도매상을 하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것은 2000년 5월 광주에서 열린 새천년문화체육대회에서 자원봉사를 펼친 일이다. 이때 그는 한달 동안 쉴새 없이 여수와 광주를 오가며 자원봉사를 했다. 광주에서 부상한 출연진을 돌봐주고 여수에 돌아오면 늘 자정이 지났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신바람 나게 활약했다고 한다.
그는 한의원을 운영하며 3가지 원칙을 꼭 지킨다.
첫째, 환자들의 속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다. 흔히 배가 아파도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환자의 속성을 잘 헤아려서 약을 써야만 제대로 효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돈을 벌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한약을 다루는 사람은 돈에 관심을 두어서는 절대로 환자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픈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한다는 점이다. 치료하는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느껴야 정확한 처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의원 개원 후 어려움도 많았다. 특히 최근 2년 동안 아들이 군에 입대하는 바람에 계약직 한의사를 채용하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한의사가 3차례나 바뀌면서 환자가 차츰 줄어들었고 한의원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그는 창제로 승부를 걸었다. 날마다 창제 목표를 세워 도전했고, 한의원에서도 틈나는 대로 창제를 계속했다. 그러자 아들이 뜻하지 않게 일찍 전역했다.
또 부자가 성심성의를 다해 환자를 맞이하고 차곡차곡 신뢰를 쌓으면서 지금은 풍덕동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지금 되돌아 보면 살아 있는 자체가 체험이고 공덕이지요.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생길 때마다 열심히 창제를 하면서 잘 이겨온 것 같아요. 앞으로는 광선유포에 전념하고 싶어요.”
그는 남은 여생 동안 광포를 위해 더욱 땀 흘리는 한편, 자신의 한의학 지식을 활용해 몸이 아픈 이웃을 도우며 살고 싶다면서 여유 넘치는 웃음을 지었다.
・순천권 순천지역 총합부지역장
장호정(hjjang@hknews.co.kr) | 화광신문 : 07/10/26 754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