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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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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찬희 e스포츠 심판

국제 심판으로! 고뇌와 함께 성장한 게임 인생



주위의 우려와 반대도 무릅쓰고 우직할 정도로 한 우물만을 팠고, 마침내 꿈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잡았다. 그 무대에서 마음껏 활약할 수 있다는 부푼 기대로 가득 찬 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을 때보다 손에 움켜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떨어져 흩어지는 꿈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이 더 섬뜩했다. 과녁을 잃은 채 허공을 헤매는 화살처럼 꿈과 함께 자신감도 의욕도 모두 잃은 채 시간을 흘려 보냈다.

강한 사람이란 매번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는 사람이 아닌, 밑바닥까지 떨어진 순간 다시 그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안찬희 씨는 진정 강한 사람이었다. 차디찬 바닥을 오히려 새로운 꿈을 향한 도약대로 삼은 그의 현재는 고뇌를 벗 삼아 전진하는 ‘청춘시대’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학회에서의 단련과 아낌 없는 격려를 보내는 학회 남자부원들 덕분에 바닥을 딛고 보다 힘찬 도약을 해낸 안찬희 씨.



─.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다고 들었다. 게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도 직업으로 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

“워낙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고, 실력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게임을 직업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이 자신이 가장 자신 있고, 좋아하는 것을 꿈으로 발전시키던 중학생 시절, 안 씨 역시 그 과정을 지나다 보니 다다른 꿈의 방향이 ‘프로게이머’였다.



─. 프로게이머가 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프로게이머라고 하면 굉장히 멋있지만, 되기 전까지는 결국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게임 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을 거예요. 부모님께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셨죠. 저도 막상 꿈을 정했지만 실현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내 꿈인 건지, 아니면 그냥 게임에 빠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렸어요.”



그때 안 씨에게 명확한 인생의 길잡이가 돼 준 곳이 바로 한국SGI였다. 가치 있는 인생의 방향으로 동행해주는 학회 남자부원들과 함께 안 씨는 더 이상의 주저함 없이 꿈을 향해 힘차게 도약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으로 국내 랭킹 23위까지 올랐어요. 그 후 한 팀의 연습생으로 스카우트됐고, 3개월 만에 S기업의 프로게이머로 발탁된 거죠.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프로게이머로 성장해 학회와 스승을 선양하겠다고 야심 차게 각오도 다졌습니다.”





“신심으로 배운 한 가지는 ‘학회’에서 멀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실패를 하더라도 결코 불행해질 리 없다는 것-‘희망’의 길이 열리고,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확신을 얻은 거죠.”





─. 꿈에 그리던 프로게이머가 된 지 1년 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울산으로 내려왔다고.

“가장 절실했던 ‘프로게이머’가 되자마자 모든 것을 잃었어요. 프로게이머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서 정식 경기무대조차 올라가 보지 못했죠. 어깨 근육이 뒤틀어졌거든요. 20분 이상 마우스를 잡고 있으면 집어던지고 싶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습니다. 의사는 수술까지도 생각해야 하고, 가능하면 직종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요.”



함께 합숙하는 친구들이 연습을 하거나 시합을 하고 돌아와 경기 이야기를 할 때면 실내에 갇혀 재활치료만 하고 있던 안 씨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결국 1년 재활치료 끝에 포기를 선언하고 지난해 1월, 고향으로 내려왔다.



“단순히 프로게이머 생활을 정리했다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된 거죠. 어깨야 재활치료를 받고 나면 생활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이 저를 덮쳤습니다.”



─.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서 꿈을 접어야 했기에 괴로움도 더 컸을 것 같다. 어떻게 새로 시작할 용기를 얻었나.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길에서 철저하게 패배했기 때문에 집에서 가족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어요. 그래서 집은 나섰는데 갈 곳이 없더라고요. 문화회관으로 갔죠. 얼마간의 방황을 하고 돌아온 저를 학회의 남자부원들은 정말 따뜻하게 맞아줬어요. 바닥을 보며 한숨만 쉬던 제게 선배 간부는 다시 ‘희망’을 볼 수 있도록 격려해줬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까지 함께 창제하고 활동해줬어요. 그래서 다시 힘을 냈습니다.”



‘이젠 모두 틀렸다’에서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일념으로 전환하자 주위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그리고 안 씨도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열렸다.



“e스포츠 심판이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한 e스포츠 협회 분이 제게 ‘심판을 뽑는데 도전해보라’고 귀띔해줬어요. 처음 제가 정한 꿈의 무대는 아니었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아래에서 원활한 경기 진행을 돕는 일이나마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다시 가슴 뛰게 만들었습니다.”



─. 2015청년평화페스티벌 도전이 새로운 꿈을 꾸는데 날개를 달아줬다고.



여전히 ‘이 길도 실패로 끝나버리면 어쩌지?’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안 씨를 괴롭혔다. 그때 ‘2015청년평화페스티벌 탭댄스팀으로 도전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어이 없었죠. 어깨 때문에 마우스도 잡을 수 없어 꿈을 접었는데,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탭댄스를 할 수 있을 리 없잖아요. 그 후 병원을 갔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팔은 이제 완치가 됐고, 격하게 흔들어도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난 심판 시험도 준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연습까지 참여할 수 있겠어’라는 마음이 있었어요.”



등 떠밀려 시작한 탭댄스 도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도전을 하며 연습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청년부원들의 약동하는 모습에 자극 받아 시험 준비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또 함께 고민을 나누고, 서로 격려하며 연습에 임하는 속에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자신감도 나날이 더해졌다.



“덕분에 필기시험도 무사히 합격하고,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서툴러서 많이 우려했던 면접도 정말 편안하게 봤어요. 탭댄스 때 많은 분들 앞에서 춤추며 연습했더니 면접관 3명 앞에서 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 ‘e스포츠 심판’의 타이틀로 새로운 출발선에 섰는데, 이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나.

“신심으로 배운 한 가지는 ‘학회’에서 멀어지지 않는 한 아무리 많은 실패와 좌절을 하더라도 결코 불행해질 리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희망’의 길이 열리고,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확신을 얻은 거죠. 지금은 ‘또 다시 실패를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일 때가 아니라 ‘현재’에서 ‘내일’을 어떻게 열어갈 것인지 모든 능력과 열정을 쏟아부을 때잖아요. 국내에서 활동하는 e스포츠 심판을 넘어서 국제 심판이 돼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을 때까지 지지 않을 겁니다!”



‘고뇌와 싸우고’ ‘고뇌와 함께 사는’것이 청춘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고뇌가 있다. 따라서 벼랑 끝까지 몰려 괴로워하며 치열하게 ‘내일’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고 있는 안찬희 씨야말로 그 누구보다 크게 성장통을 겪으며 도약하고 있는 청춘이다.

·방어진권 男지구리더






장선아(sajang@) | 화광신문 : 15/05/15 1117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