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연기강사 이민정
배우의 꿈 좌절 딛고 연기강사로 제2의 도약!
“쟤는 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문제다. 문제야-.”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고 연극판을 전전하는 이민정 씨의 모습에 아버지의 한숨은 깊어졌다.
연기자를 꿈꾸던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지내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로 영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내 길이 아니다’는 생각에 다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대학로 무대에도 오르며 배우의 꿈을 키웠지만 그 후의 진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막막했다.
“중학교 때 길거리 캐스팅(연예활동 제안)이 됐고 그때부터 기획사와 연기학원을 오가며 배우의 꿈을 키웠어요. 오직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달려왔는데 기회가 많지 않아 좌절도 많이 했죠. 또 경제 활동을 하지 않으니 생활도 어려워지고-.”
그때 여자부 선배는 지금이야말로 ‘신심으로 도전해 볼 때’라며 학회 활동을 제안했다. 어머니를 따라 어렸을 때는 회합에도 곧잘 참석했던 그였지만 대학생활을 하면서 신심과는 한참 멀어져 있었다.
“너무 절박한 상황이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기원하는 게, 집에 있는 것보다는 회관에 가는 게 편했어요. 그리고 제가 약간 끝장을 보는 성격이에요. 될 때까지 기원해 보자고 정하고 창제에 도전했어요. 그때 제 별명이 창제의 여왕이었어요~.(웃음)”
그러면서 이 씨는 그룹장 사명도 받고 21세기사명회로서 소녀부원도 챙겨갔다. 그렇게 학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그녀는 해돋이총회까지 자신의 진로를 정하겠다고 기원하고 활동했다.
그리고 우연히 아역배우 아카데미에 연기강사 공고가 떠 이력서를 넣었고 기원한 대로 해돋이총회가 끝나자마자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다.
“사실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경력도 많지 않아 불안했어요. 그래서 그냥 편안하게 보고 오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함께 일해 보자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이들 연기를 가르치는 데 학벌과 경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성이라는 판단에서 그를 뽑은 것이었다.
현재 이 씨는 4세부터 중학생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래의 ‘김혜수’ ‘장동건’을 꿈꾸는 아이들도 있지만 교육 그 자체를 목적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말만 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며 여섯 살짜리 아이를 부모님이 데려오셨어요. 아무 말도 않고 구석에 있던 아이가 4개월쯤 조금씩 대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6개월 때는 자기표현도 잘하고 완전히 달라져서 나갔어요. 그때 정말 뿌듯했어요. 연기는 그런 것 같아요.”
낯을 가리고 소심했던 이 씨도 연기를 배우며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씨가 연기 지도를 하며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인성이다. 좋은 마음씨에서 좋은 연기가 우러나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제가 예전에는 정말 차가웠어요. 그래도 끊임없이 연락해 주는 여자부 선배들 덕분에 학회 속에서 단련 받으며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라며 활짝 웃어 보이는 그녀는 감사함을 잊지 않고 더 넓은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불법을 넓히겠다고 다짐한다.
·송파권 풍납지부 女그룹장
박수인(suin@) | 화광신문 : 13/05/24 1022호 발췌
“쟤는 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문제다. 문제야-.”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고 연극판을 전전하는 이민정 씨의 모습에 아버지의 한숨은 깊어졌다.
연기자를 꿈꾸던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며 평범하게 지내길 바라는 아버지의 기대로 영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건 정말 내 길이 아니다’는 생각에 다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대학로 무대에도 오르며 배우의 꿈을 키웠지만 그 후의 진로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막막했다.
“중학교 때 길거리 캐스팅(연예활동 제안)이 됐고 그때부터 기획사와 연기학원을 오가며 배우의 꿈을 키웠어요. 오직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달려왔는데 기회가 많지 않아 좌절도 많이 했죠. 또 경제 활동을 하지 않으니 생활도 어려워지고-.”
그때 여자부 선배는 지금이야말로 ‘신심으로 도전해 볼 때’라며 학회 활동을 제안했다. 어머니를 따라 어렸을 때는 회합에도 곧잘 참석했던 그였지만 대학생활을 하면서 신심과는 한참 멀어져 있었다.
“너무 절박한 상황이라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기원하는 게, 집에 있는 것보다는 회관에 가는 게 편했어요. 그리고 제가 약간 끝장을 보는 성격이에요. 될 때까지 기원해 보자고 정하고 창제에 도전했어요. 그때 제 별명이 창제의 여왕이었어요~.(웃음)”
그러면서 이 씨는 그룹장 사명도 받고 21세기사명회로서 소녀부원도 챙겨갔다. 그렇게 학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그녀는 해돋이총회까지 자신의 진로를 정하겠다고 기원하고 활동했다.
그리고 우연히 아역배우 아카데미에 연기강사 공고가 떠 이력서를 넣었고 기원한 대로 해돋이총회가 끝나자마자 면접의 기회가 주어졌다.
“사실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경력도 많지 않아 불안했어요. 그래서 그냥 편안하게 보고 오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함께 일해 보자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이들 연기를 가르치는 데 학벌과 경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성이라는 판단에서 그를 뽑은 것이었다.
현재 이 씨는 4세부터 중학생까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미래의 ‘김혜수’ ‘장동건’을 꿈꾸는 아이들도 있지만 교육 그 자체를 목적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한 번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말만 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며 여섯 살짜리 아이를 부모님이 데려오셨어요. 아무 말도 않고 구석에 있던 아이가 4개월쯤 조금씩 대사를 하기 시작하더니 6개월 때는 자기표현도 잘하고 완전히 달라져서 나갔어요. 그때 정말 뿌듯했어요. 연기는 그런 것 같아요.”
낯을 가리고 소심했던 이 씨도 연기를 배우며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이 씨가 연기 지도를 하며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인성이다. 좋은 마음씨에서 좋은 연기가 우러나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제가 예전에는 정말 차가웠어요. 그래도 끊임없이 연락해 주는 여자부 선배들 덕분에 학회 속에서 단련 받으며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라며 활짝 웃어 보이는 그녀는 감사함을 잊지 않고 더 넓은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불법을 넓히겠다고 다짐한다.
·송파권 풍납지부 女그룹장
박수인(suin@) | 화광신문 : 13/05/24 1022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