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제헌 (재)한국문물연구원 고고조사부 과장
과거에 숨결 불어 넣는 고고학 사나이
학회에서 ‘인내’ ‘끈기’ 발굴 현장에서 당당히 펼쳐
지난 2009년 경남 창원역 근처에서 삼국시대 것으로 보이는 큰 마을이 발견됐다. 철이나 구리를 뽑아내는 제련공정과 만들어진 금속을 녹이는 용해작업에 사용되는 큰 규모의 제련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금속을 다루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됐다. 이 마을의 발견으로 창원시가 가야 혹은 신라시대에 쓰인 금속을 만드는 중요한 요지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더욱 고무적이었던 것은 제련로 근처에서 발견된 도구들이 훼손되지 않았고, 원형으로 이루어진 제련로가 잘 보존되어 얼마 만큼의 금속을 생산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됐다.
이 발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제헌 씨는 “창원 유적에서 출토된 주조철부, 거푸집과 안틀 등으로 볼 때 적어도 서기 전부터 제련로가 사용됐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제련로 구조와 형태 변화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어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금속 생산기술의 발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역사학계의 소득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씨는 현재 (재)한국문물연구원 고고조사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6년 입사해 둘도 없는 인류문화유산을 끝까지 지키고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제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부산·울산·경북 쪽에 고속도로 건설이나 청사 혹은 역사 등을 건설할 곳을 답사해 훼손 전에 발굴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찾는 것입니다.”
그의 일은 천 년이 넘는 한반도의 문화를 발굴하는 것이기에 어디를 가도, 어느 땅을 밟아도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 씨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어느 의미에서 ‘의표’를 찔렀다.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흙’이라고 했다. 새로운 곳에서 유적을 발굴할 때, 주위의 산에서 시시각각 내려와 덮는 흙은 그에게 최대의 적이다. 그 한알 한알은 보잘것없을지라도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흙은 중압 때문에 토사붕괴를 일으킨다.
한 번 방심하면 귀중한 유산이 흙 밑에 파묻혀 복구할 수 없는 파괴로 이어지고 만다. 연구를 거듭한 이 씨는 토사붕괴를 막고자 이중, 삼중 흙담을 쌓고, 나무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놓기도 한다. 그 밖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고 말한다.
“일을 마무리했다가도 흘러내리는 흙으로 덮인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문화재 발굴은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부산울산고속도로 차선 확장 공사가 실행되기 전에 시행하는 발굴 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시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적어도 1000년 전에 살았던 5가구의 터를 발굴했다. 그는 좀 더 세밀하게 봐야 알겠지만, 집터의 규모와 개울물이 흘렀던 방향으로 봐서는 농사를 주업으로 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고 한다.
“저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살았던 민초의 삶을 발굴할 때마다 가끔 제가 어느 시대에 사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귀족의 무덤도, 화려한 금색 왕관을 발견했을 때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 사람들의 발자취를 발굴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이 문화재 발굴이라면 왠지 화려한 문화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화재는 서민들이 살아온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주의 흔적을 찾다 보면 조상의 지혜와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진정한 문화유산이 아닐까요?”
사실 그는 입사 후, 발굴된 현장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하는 부서에서 일했다. 그런데 회사의 운영방침과 경영 체제가 바뀌며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일하는 부서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현장의 일이 달갑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 발굴을 시작하게 되면 3~6개월은 현장에서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학회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회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신심에 대한 마음도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2009년, 이러한 이 씨의 마음을 아는지 학회 남자부 선배는 그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와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를 연찬하고 최대의 격려를 해주었다.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를 읽으면서 학회활동과 일은 병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학회활동은 인생의 근본이며 행복해지기 위한 권리였습니다. ‘반드시 승리한다’고 일념을 정하고 어본존께 부딪혀 나갔습니다.”
그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자신보다 괴로운 벗을 위해 달려갔다. 소극적인 성격이기에 타인에게 신심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지만, 있는 그대로 자신의 체험을 타인에게 말하게 됐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상쾌했다. 직장동료에게도 위대한 불법을 전하며 ‘생활 속의 포교’를 실천했다. 불법을 몸소 실천하며 일념이 상쾌해지자 발굴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경남 창원 일대의 제련로도 발견하게 됐다. 그 공적은 아직도 박물관에 전시돼 이 씨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있다.
“인내와 끈기로 일해야 하는 발굴의 현장에서 당당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불법의 힘이라 확신합니다. 그때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승리의 영관은 신심을 근본으로 자신이 정한 길을 집념을 다해 끈질기게 걸어간 사람의 머리 위에 빛납니다”라는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를 가슴에 새기며 희망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 씨는 오늘도 땡볕 아래에서 천 년 전 누군가의 발자취를 찾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고고학 전문가를 목표로 도전하겠습니다. 희망은 무한하기 때문에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어떠한 괴로움도 내려다보며 나아갈 수 있는 경애를 구축하겠습니다.”
·수정권 초량지부 남자부장
김기수(kimks@) | 화광신문 : 13/05/03 1019호 발췌
학회에서 ‘인내’ ‘끈기’ 발굴 현장에서 당당히 펼쳐
지난 2009년 경남 창원역 근처에서 삼국시대 것으로 보이는 큰 마을이 발견됐다. 철이나 구리를 뽑아내는 제련공정과 만들어진 금속을 녹이는 용해작업에 사용되는 큰 규모의 제련로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금속을 다루는 사람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됐다. 이 마을의 발견으로 창원시가 가야 혹은 신라시대에 쓰인 금속을 만드는 중요한 요지였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더욱 고무적이었던 것은 제련로 근처에서 발견된 도구들이 훼손되지 않았고, 원형으로 이루어진 제련로가 잘 보존되어 얼마 만큼의 금속을 생산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됐다.
이 발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제헌 씨는 “창원 유적에서 출토된 주조철부, 거푸집과 안틀 등으로 볼 때 적어도 서기 전부터 제련로가 사용됐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제련로 구조와 형태 변화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어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금속 생산기술의 발전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역사학계의 소득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씨는 현재 (재)한국문물연구원 고고조사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6년 입사해 둘도 없는 인류문화유산을 끝까지 지키고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제가 회사에서 하는 일은 부산·울산·경북 쪽에 고속도로 건설이나 청사 혹은 역사 등을 건설할 곳을 답사해 훼손 전에 발굴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찾는 것입니다.”
그의 일은 천 년이 넘는 한반도의 문화를 발굴하는 것이기에 어디를 가도, 어느 땅을 밟아도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 씨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어느 의미에서 ‘의표’를 찔렀다.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흙’이라고 했다. 새로운 곳에서 유적을 발굴할 때, 주위의 산에서 시시각각 내려와 덮는 흙은 그에게 최대의 적이다. 그 한알 한알은 보잘것없을지라도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흙은 중압 때문에 토사붕괴를 일으킨다.
한 번 방심하면 귀중한 유산이 흙 밑에 파묻혀 복구할 수 없는 파괴로 이어지고 만다. 연구를 거듭한 이 씨는 토사붕괴를 막고자 이중, 삼중 흙담을 쌓고, 나무로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놓기도 한다. 그 밖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고 말한다.
“일을 마무리했다가도 흘러내리는 흙으로 덮인 적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문화재 발굴은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부산울산고속도로 차선 확장 공사가 실행되기 전에 시행하는 발굴 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시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적어도 1000년 전에 살았던 5가구의 터를 발굴했다. 그는 좀 더 세밀하게 봐야 알겠지만, 집터의 규모와 개울물이 흘렀던 방향으로 봐서는 농사를 주업으로 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것 같다고 한다.
“저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살았던 민초의 삶을 발굴할 때마다 가끔 제가 어느 시대에 사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귀족의 무덤도, 화려한 금색 왕관을 발견했을 때도 아니라고 한다. 그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 사람들의 발자취를 발굴할 때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사람들이 문화재 발굴이라면 왠지 화려한 문화재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문화재는 서민들이 살아온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주의 흔적을 찾다 보면 조상의 지혜와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것이 진정한 문화유산이 아닐까요?”
사실 그는 입사 후, 발굴된 현장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하는 부서에서 일했다. 그런데 회사의 운영방침과 경영 체제가 바뀌며 자연스럽게 현장에서 일하는 부서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현장의 일이 달갑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 발굴을 시작하게 되면 3~6개월은 현장에서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학회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회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없게 된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신심에 대한 마음도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2009년, 이러한 이 씨의 마음을 아는지 학회 남자부 선배는 그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와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를 연찬하고 최대의 격려를 해주었다.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를 읽으면서 학회활동과 일은 병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학회활동은 인생의 근본이며 행복해지기 위한 권리였습니다. ‘반드시 승리한다’고 일념을 정하고 어본존께 부딪혀 나갔습니다.”
그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자신보다 괴로운 벗을 위해 달려갔다. 소극적인 성격이기에 타인에게 신심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지만, 있는 그대로 자신의 체험을 타인에게 말하게 됐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상쾌했다. 직장동료에게도 위대한 불법을 전하며 ‘생활 속의 포교’를 실천했다. 불법을 몸소 실천하며 일념이 상쾌해지자 발굴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경남 창원 일대의 제련로도 발견하게 됐다. 그 공적은 아직도 박물관에 전시돼 이 씨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있다.
“인내와 끈기로 일해야 하는 발굴의 현장에서 당당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불법의 힘이라 확신합니다. 그때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승리의 영관은 신심을 근본으로 자신이 정한 길을 집념을 다해 끈질기게 걸어간 사람의 머리 위에 빛납니다”라는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를 가슴에 새기며 희망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 씨는 오늘도 땡볕 아래에서 천 년 전 누군가의 발자취를 찾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고고학 전문가를 목표로 도전하겠습니다. 희망은 무한하기 때문에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어떠한 괴로움도 내려다보며 나아갈 수 있는 경애를 구축하겠습니다.”
·수정권 초량지부 남자부장
김기수(kimks@) | 화광신문 : 13/05/03 1019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