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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박상곤 퀸보석 대표 ‘정직’ ‘친절’ 20년, 최고의 보석은 고객과 쌓은 ‘신뢰’!



생명 연마하는 마음으로 제품 관리…신심 통해 크고 작은 위기에도 긍정적인 확신의 마음으로



눈을 뗄 수 없다.

한없이 투명한 푸른빛의 사파이어, 붉은빛 유혹을 던지는 루비, 영롱한 자태의 진주와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의 왕 다이아몬드까지. 대낮처럼 밝은 할로겐 조명 아래 진열대를 가득 메운 보석들이 빚어내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이 눈을 사로잡은 채 놓아주질 않는다.

‘가장 좋은 보석은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자 ‘돈이 아니라 의미가 담긴 보석’이라고 답하는 ‘퀸보석’ 박상곤 대표. 보석의 아름다운 가치란 가격이 아니라 그것에 담긴 애정과 사랑의 의미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한번은 고객이 반지를 들고 왔습니다. 당신이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반지인데 이제 본인 며느리에게 물려주려고 하니 사이즈만 바꿔서 세팅해 달라는 거였죠. 그 순간 반지 하나 속에 담긴 깊은 애정과 세월을 어떻게 값으로 매길 수 있겠습니까.”

광주에서 자란 토박이로 20여 년째 보석판매업을 하고 있는 그의 진솔한 답을 들으며 절로 얼굴이 달아오른다. 참으로 ‘우문현답’이 아닐 수 없다.

국내 보석시장의 성장과 거의 역사를 같이해 온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요즘 같은 불경기는 눈 뜨고 처음이란다. 직접적인 의식주와 관계된 생필품이 아니다 보니 그 어떤 품목보다 경기를 타는 보석시장은 바닥을 치고도 더 내려갈 곳이 없는 상황. 그러다 보니 불과 몇 년 사이에 영업장의 3분의 2가 문을 닫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표는 그 속에서 사업 성장을 이뤄가고 있다. 대부분 판매상도 현상유지가 기적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꾸준히 매출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영업비결을 묻자 ‘정직, 신뢰, 친절’을 꼽았다.

“정직은 최우선입니다. 지금껏 고객과 어떤 트러블도 없이 올 수 있었던 건 ‘절대 속이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음은 신뢰입니다. 기한이나 가공상태 등 고객과 약속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어야 합니다. 마지막 친절은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당연히 갖춰야 할 덕목이 아닐까요.”

작은 귀금속에서 초고가품까지. 가격대가 크다 보니 한 달이면 많게는 몇 억대의 매출이 왔다 갔다 하는 시장에서 이렇듯 빛을 발하는 그의 ‘원칙주의’는 쉽지 않았던 사업 역정을 지켜올 수 있었던 신심의 결과라고 힘주어 말한다.

잘 나가던 식품회사 영업담당의 일을 정리하고 귀금속 판매업에 뛰어든 건 1989년. 그를 신심의 세계로 이끌어 준 부인 김경화 씨가 미래를 위해 보다 전문적이고 안정적이며 무엇보다 학회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직종으로 전환해 볼 것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마침 처가 인척 중에 귀금속 회사를 운영하는 분을 소개받은 그는 그곳에서 영업, 제작, 유통, 관리까지 귀금속 업무를 철저히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판매를 시작한 박 씨는 1990년 정식 매장을 열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객유치와 인맥관리를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화려한 대외 활동에 쏠리기 시작했고 이제 막 받았던 반장 사명은 점점 유명무실해졌다. 그런데 성장 가도를 달리는 듯하던 사업이 자본금을 몽땅 사기당한 채 위기를 맞고 말았다. 당시 몇천만 원의 금액이었지만 현 시세로 따지면 얼마가 될지 모를 종잣돈을 날려버린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던 박 씨는 부인의 손에 이끌려 신심 선배와 대화할 수 있었고 ‘법화경의 병법’을 잊어버린 채 곁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신심을 진지하게 반성했다.

“다시는 신심을 잊지 않기 위해 모든 회합의 100% 참석, 일념을 다한 매일의 창제, 그리고 스승과 불법을 알리는 홍교활동 세 가지를 결의했습니다. 그 뒤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잡은 그는 더욱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보석감정사에 도전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에는 정식 학과가 아예 없었고 전문적인 교육기관도 서울에 몇 군데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서울까지 비행기 표를 수십 장씩 끊어가며 열정을 불태웠고 97년 마침내 국가공인보석감정사 자격을 따냈다. 광주에서는 손에서 꼽는 일이었고, 덕분에 고객들에게 높은 신뢰를 얻으며 확실한 차별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사업을 다시 일으켜가던 2000년대 중반 그는 일생일대의 위기를 또 한 번 맞았다. 새벽에 도둑이 들어 매장의 귀금속 대부분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당시 TV와 언론에 보도될 만큼 큰 사건으로 그는 결국 사업을 접어야만 할 상황에 처했지만, 이제 확고한 신심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박 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성한 기원을 불태우며 도전했고 마침내 경비업체로부터 전액을 보상받는,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었던 반전을 만들어 냈다.

이후 오늘날까지 크고 작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바뀐다는 확신을 새겨올 수 있었다는 박상곤 씨. 올해 ‘대왕자반’ 구축과 ‘청년육성’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사)귀금속판매업중앙회 광주지부 상임부회장으로서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스승을 알려나감으로써 사회와 이웃에 등불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단다.

이제 그는 공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고 말한다.

“가장 진실한 공덕은 가족의 행복입니다. 매일 금은보화를 직접 만지며 수많은 고객을 상대하는 동안 오히려 재산이나 명예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절실히 느낀 거죠.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아내 그리고 자신의 길에 철저하며 학회의 인재로 성장해 준 딸과 아들이 저에겐 가장 소중한 보석입니다.”

다이아몬드도 원석인 채로는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 갈고 닦아서 아름답고 멋진 광채를 발할 때 비로소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지 않음을 알기에 오늘도 ‘내 생명의 찬란한 빛’을 연마하기 위해 창제한다는 그의 얼굴을 보며 눈이 부시다고 느낀 건 조명 탓은 아니었다.

·남광주권 방림지역장



김태헌(uncle@) | 화광신문 : 13/03/01 1010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