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김영학 종합인쇄 영일사 대표
인쇄를 천직으로 걸어온 40여년
철저한 신용 바탕으로 고난의 세월 굳건히 자리 지켜
딸의 진심에 입회! 일가화락으로 행복 가정 이뤄
항구도시 부산의 상권을 대표하는 국제시장 사거리. 세월의 빛을 담은 듯 걸려있는 하얀 나무 간판이 선명하다.
‘종합인쇄 영일사’.
“하하 열심히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김영학(82) 씨의 당당한 얼굴에선 여든을 넘긴 그의 나이를 찾아 볼 수 없다.
건물 지하 작은 사무실로 들어서자 불 켜진 라이트 박스 위에 손때 묻은 자와 도구들이 그가 아직도 건재한 현역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40여 년. 수많은 가게들이 개업을 하고 사라지는 세월 속에서도 김 씨가 인쇄를 천직으로 걸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철저한 ‘신용’이다.
“‘틀림없다!’는 평판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신뢰를 얻은 손님을 통해 또 새로운 손님을 만날 때 제일 뿌듯한 기쁨을 느낍니다.”
책부터 달력, 명함, 연하장, 스티커에 이르기까지 인쇄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은 ‘약속이 생명’이라고 믿는 김 씨. 특히 회의나 논문자료처럼 마감이 중요한 일감은 날을 새서라도 반드시 맞춰주는 것이 철칙이다. 이렇듯 정확한 시간에 최고의 품질로 납품하기 위해 노력해 온 덕분에 그는 지금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인쇄업을 시작한 건 나이 마흔을 넘어서였다.
서른이 다 되어 군대를 제대한 김 씨는 이 일 저 일 온갖 잡일을 전전했다. 특히 장사에 뜻을 두고 옷장사, 약장사, 책장사 안 팔아 본 게 없을 정도였지만 사업은 쉬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을 안고 상가 앞을 지나던 그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어느 등사가계 앞. 군대에서 등사기술을 접해 봤던 그는 당시 등사기계로 간단한 프린트를 해 주던 가게를 보며 ‘이거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게 무작정 찾아간 그 곳에서 기술을 배운 김 씨는 등사가계로 문을 연지 2년 만에 인쇄기계 3대를 들여놓으며 지금의 ‘영일사’를 시작했다.
나라 전체가 한참 성장가도를 달리던 당시 그의 타고난 성실은 주위의 신뢰와 평판으로 이어졌다. 밀려드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일주일 내내 철야를 한 적도 많았다는 그는 아직껏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단다.
매일 아침이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사무실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인생의 무대다.
“집에만 있으면 게을러집니다. 일이 있건 없건 나와서 움직여야 하죠. 일을 하는 짬짬이 어서와 스피치를 읽다 보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게을러 질 틈이 없죠.”
시간만 나면 화광신문과 법련을 한 자 한 자 읽으며, 중요한 내용은 메모를 해서 다시 공부한다는 김영학 씨. 그가 꼼꼼하게 줄을 쳐 가며 연찬한 자료에는 소설 ‘신·인간혁명’의 한 구절이 선명하게 씌어 있다.
“제목을 끝까지 부르는 사람은 언제나 어본존과 함께 있습니다.”
이렇듯 지금은 건강과 행복이 모두 신심의 복운이라고 확신하는 그지만, 불법을 시작하던 1993년만 해도 정말 완강하게 신심을 반대했었다. 당시 사회적인 몰인식과 근거 없는 이야기들만을 믿고 이상한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 김 씨를 이끌어 준 것은 둘째 딸 김향순 씨였다.
병약한 몸이면서도 자폐를 앓고 있던 동생 기범 씨를 위해 스스로 창제를 시작한 향순 씨는 가족의 반대 속에서도 결핵을 신심으로 극복하고 직장과 여자부 활동을 병행했다. 그렇게 막내 동생을 돌보며 집안의 살림꾼으로 정성을 다했던 향순 씨는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신심을 권유했다.
“아버지, 기범이를 위해서라도 이 신심을 해 주세요. 우리 가족 행복을 위해서 꼭 해 주세요.”
그때껏 반대와 꾸지람만을 일삼았던 김 씨였지만 누구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헌신했던 딸의 간곡한 말에 마음을 정하고 입회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창제를 했지만 선배들과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올바른 삶의 길을 알 수 있었고, 2년 뒤에는 반장 사명을 받으며 회원들의 행복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는 드디어 아내 김희월 씨와 막내아들 기범 씨도 입회. 일가화락의 신심을 이루었다.
그렇게 어렵게 신심을 시작한 지 20여 년. 김 씨 가족의 행복은 어느새 탐스럽게 여물었다. 언제나 몸이 쇠약해 통증을 호소하던 아내는 남들 못지않게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었고, 자폐를 심하게 앓았던 기범 씨는 성실하게 직장을 다닐 정도로 좋아졌다. 어려운 환경에도 훌륭하게 성장해 영국에 살고 있는 큰아들 기덕 씨와 서울에서 알뜰하게 살고 있는 큰딸 양근 씨. 그리고 부산에서 부인부로 훌륭하게 활약하고 있는 향순 씨까지. 그는 일가의 행복이 모두 어본존의 공덕이라고 확신한다.
무엇보다 그가 확신하는 가장 큰 공덕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예전엔 소위 잘나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지금은 그 친구들이 당당하게 일하는 자기를 제일 부러워한다나. 지금도 여러 모임에서 활발하게 노는 그를 보고 “저 영감은 뭘 먹어서 저렇게 펄펄 난다냐?”라고 시샘 어린 질문을 받을 때면 김 씨는 자신 있게 한마디를 날린단다.
“이기 다 내가 신심하는 공덕인기라. 니도 믿어봐라!”
·영도권 절영지부 반장
김태헌(uncle@) | 화광신문 : 13/01/01 1003호 발췌
철저한 신용 바탕으로 고난의 세월 굳건히 자리 지켜
딸의 진심에 입회! 일가화락으로 행복 가정 이뤄
항구도시 부산의 상권을 대표하는 국제시장 사거리. 세월의 빛을 담은 듯 걸려있는 하얀 나무 간판이 선명하다.
‘종합인쇄 영일사’.
“하하 열심히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밝은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김영학(82) 씨의 당당한 얼굴에선 여든을 넘긴 그의 나이를 찾아 볼 수 없다.
건물 지하 작은 사무실로 들어서자 불 켜진 라이트 박스 위에 손때 묻은 자와 도구들이 그가 아직도 건재한 현역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40여 년. 수많은 가게들이 개업을 하고 사라지는 세월 속에서도 김 씨가 인쇄를 천직으로 걸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철저한 ‘신용’이다.
“‘틀림없다!’는 평판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신뢰를 얻은 손님을 통해 또 새로운 손님을 만날 때 제일 뿌듯한 기쁨을 느낍니다.”
책부터 달력, 명함, 연하장, 스티커에 이르기까지 인쇄라고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은 ‘약속이 생명’이라고 믿는 김 씨. 특히 회의나 논문자료처럼 마감이 중요한 일감은 날을 새서라도 반드시 맞춰주는 것이 철칙이다. 이렇듯 정확한 시간에 최고의 품질로 납품하기 위해 노력해 온 덕분에 그는 지금의 입지를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인쇄업을 시작한 건 나이 마흔을 넘어서였다.
서른이 다 되어 군대를 제대한 김 씨는 이 일 저 일 온갖 잡일을 전전했다. 특히 장사에 뜻을 두고 옷장사, 약장사, 책장사 안 팔아 본 게 없을 정도였지만 사업은 쉬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을 안고 상가 앞을 지나던 그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어느 등사가계 앞. 군대에서 등사기술을 접해 봤던 그는 당시 등사기계로 간단한 프린트를 해 주던 가게를 보며 ‘이거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렇게 무작정 찾아간 그 곳에서 기술을 배운 김 씨는 등사가계로 문을 연지 2년 만에 인쇄기계 3대를 들여놓으며 지금의 ‘영일사’를 시작했다.
나라 전체가 한참 성장가도를 달리던 당시 그의 타고난 성실은 주위의 신뢰와 평판으로 이어졌다. 밀려드는 주문을 맞추기 위해 일주일 내내 철야를 한 적도 많았다는 그는 아직껏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단다.
매일 아침이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사무실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인생의 무대다.
“집에만 있으면 게을러집니다. 일이 있건 없건 나와서 움직여야 하죠. 일을 하는 짬짬이 어서와 스피치를 읽다 보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게을러 질 틈이 없죠.”
시간만 나면 화광신문과 법련을 한 자 한 자 읽으며, 중요한 내용은 메모를 해서 다시 공부한다는 김영학 씨. 그가 꼼꼼하게 줄을 쳐 가며 연찬한 자료에는 소설 ‘신·인간혁명’의 한 구절이 선명하게 씌어 있다.
“제목을 끝까지 부르는 사람은 언제나 어본존과 함께 있습니다.”
이렇듯 지금은 건강과 행복이 모두 신심의 복운이라고 확신하는 그지만, 불법을 시작하던 1993년만 해도 정말 완강하게 신심을 반대했었다. 당시 사회적인 몰인식과 근거 없는 이야기들만을 믿고 이상한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 그런 김 씨를 이끌어 준 것은 둘째 딸 김향순 씨였다.
병약한 몸이면서도 자폐를 앓고 있던 동생 기범 씨를 위해 스스로 창제를 시작한 향순 씨는 가족의 반대 속에서도 결핵을 신심으로 극복하고 직장과 여자부 활동을 병행했다. 그렇게 막내 동생을 돌보며 집안의 살림꾼으로 정성을 다했던 향순 씨는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신심을 권유했다.
“아버지, 기범이를 위해서라도 이 신심을 해 주세요. 우리 가족 행복을 위해서 꼭 해 주세요.”
그때껏 반대와 꾸지람만을 일삼았던 김 씨였지만 누구보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헌신했던 딸의 간곡한 말에 마음을 정하고 입회했다.
처음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창제를 했지만 선배들과의 꾸준한 대화를 통해 올바른 삶의 길을 알 수 있었고, 2년 뒤에는 반장 사명을 받으며 회원들의 행복을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에는 드디어 아내 김희월 씨와 막내아들 기범 씨도 입회. 일가화락의 신심을 이루었다.
그렇게 어렵게 신심을 시작한 지 20여 년. 김 씨 가족의 행복은 어느새 탐스럽게 여물었다. 언제나 몸이 쇠약해 통증을 호소하던 아내는 남들 못지않게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었고, 자폐를 심하게 앓았던 기범 씨는 성실하게 직장을 다닐 정도로 좋아졌다. 어려운 환경에도 훌륭하게 성장해 영국에 살고 있는 큰아들 기덕 씨와 서울에서 알뜰하게 살고 있는 큰딸 양근 씨. 그리고 부산에서 부인부로 훌륭하게 활약하고 있는 향순 씨까지. 그는 일가의 행복이 모두 어본존의 공덕이라고 확신한다.
무엇보다 그가 확신하는 가장 큰 공덕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건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예전엔 소위 잘나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지금은 그 친구들이 당당하게 일하는 자기를 제일 부러워한다나. 지금도 여러 모임에서 활발하게 노는 그를 보고 “저 영감은 뭘 먹어서 저렇게 펄펄 난다냐?”라고 시샘 어린 질문을 받을 때면 김 씨는 자신 있게 한마디를 날린단다.
“이기 다 내가 신심하는 공덕인기라. 니도 믿어봐라!”
·영도권 절영지부 반장
김태헌(uncle@) | 화광신문 : 13/01/01 1003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