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1000호의 여정을 함께한 오광포 김동화 화백
‘요정 핑크’부터 ‘빨간 자전거’까지. 이제는 한국만화계의 거장으로 자리잡은 세월에도 언제나 ‘만화가’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고집하는 진정한 쟁이 김동화 화백. 질끈 묶은 회색 머리와 뿔테 안경 너머 소탈한 그의 눈빛은 언제나 맑다.
20여 년을 한결같이 우리 곁의 ‘오광포 반장’으로 살아 온 그에게 화광신문 연재 1000회의 감상을 들어본다.
창간 당시…
불법의 심원한 철학에 매료돼 순수하게 자신의 성장을 위해 입회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불법의 철학을 가장 쉽게 담는 만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었다.
─. ‘화광신문’이 지령 1000호를 맞이했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장수무대에 불려나온 기분이랄까? 늘 원고 이메일을 받으며 호수를 세어 보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 요청을 받고 화들짝 놀라서 다시 헤아려 보았다. 주간신문으로서 ‘화광신문’의 20여 년 성장을 함께 참여해 온 날들을 돌아보며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 연재는 처음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1991년 화광신문의 전신인 ‘성교타임즈’ 창간 때 의뢰를 받았다. 당시 불과 몇 명밖에 없던 창간 멤버들의 연재 요청을 받은 기억이 난다. 재능기부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저 당연히 해야 한다는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 오광포 반장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엑스파일을 몇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나.
하하 좋다. 최선을 다해 대답하겠다.
─. 먼저 이름은 왜 ‘오광포’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가장 큰 화두는 역시 ‘광선유포(廣宣流布)’다. 그래서 쉽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광포’를 정했고. 여러 가지 감정의 의미를 담아 ‘오’라는 감탄사를 성으로 삼았다. ‘오! 광포!’ 같은 느낌?
─. 그럼 왜 ‘반장’인가.
생명과 생명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가장 일선의 주인공은 반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반장이라는 사명이 참 좋다. 고난도 많지만 움직인 만큼 성장도 눈에 보이는 제일선 간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다.
─. 반장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 가족 소개도 부탁한다.
결혼 10년차 전후의 30대 중반 부부를 모델로 삼았다. 오광포 반장은 30대 중반, 부인은 30대 초반, 아들이 10세 전후, 딸이 7세 전후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의 이름을 따로 생각해 놓지는 않았다.
─. 연령대에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느낀다. 청년과 중장년을 아우르는 세대로서, 안정적이기 보다는 부딪히고 성장하며 끊임없이 갖춰나가는 가장 활발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가족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 엑스파일 마지막 질문이다. 입회동기는.
하하 뭐라고 답해야 할까? 김동화한테 포교당해서? 당연히 창간과 함께 시작된 거지만 한 가지 선명하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창간 당시도 지금 만큼이나 포교 열기가 전국적으로 뜨거웠다. 그런데 병이나 경제고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입회한 분이 많았던 그때에도, 불법의 심원한 철학에 매료돼 순수하게 자신의 성장을 위해 입회하는 분들이 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불법의 철학을 가장 쉽게 담는 만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었다.
─. 답변 감사하다. 1000회를 연재하면서 느끼는 감상은.
늘 배운다는 것이다. 원고를 검토하며 그때마다 새로운 흐름을 알게 되고 자신을 점검하게 된다.
─. 솔직히 지금쯤이면 소재만 봐도 감이 오지 않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솔직히 종교만화는 가장 어렵다. 만화의 맛이라는 것이 소재를 뒤집고, 꼬집고, 할퀴는(?) 반전의 미학인데 종교만화는 재미보다 계몽을 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으니 한계선이 명확하다. 그렇다고 만화의 맛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재미있게 만들려면 매번 고민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짧은 호흡안에 모든 승부를 걸어야 하는 4컷 만화와 만평은 만화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 ‘화광신문’ 연재는 영원한 도전이다.
─. 그렇다면 오광포 반장의 눈으로 바라본 화광신문의 변화를 한마디 부탁한다.
정말 눈부신 성장이다. 레이아웃도, 내용도, 부수도 사회적 위상도 놀랍다. 나는 근래 20여 년에 이룩한 대한민국의 초고도 성장이 화광신문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화광신문에 담긴 니치렌대성인과 이케다 SGI 회장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꿈과 희망을 열어 온 회원들, 그리고 그 소중한 성장이 모여 이룩한 한국SGI의 발전이 깔려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 화광신문의 성장과 함께 본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나.
신심을 하는 모든 분들이 성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로서도 청소년 만화의 오랜 시기를 접고 한국의 정서를 담은 작품들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고, 해외까지 인정을 받아 11개 나라에서 10여 권의 작품을 출간할 수 있었다. 덕분에 ‘빨간 자전거’가 ‘2006 프랑스 만화 비평 대상’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되는 등 다년간 많은 곳에서 수상과 격려를 받았다.
─.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만화계 발전에도 바빴던 것으로 안다. 최근엔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한국만화의 세계화를 위해서 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요즘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운영위원장으로 내 몫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직함으로 불리는 것이 싫다. 직함은 한국 만화의 발전을 위한 심부름일 뿐이지 나는 오직 ‘만화가’라는 이름이면 된다. 작품이 없는 작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그럼, 요즘 활동에 대해 부탁한다.
프랑스나 일본처럼 만화의 스펙트럼이 폭넓게 발전된 나라들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한번은 70대 노부부가 서점에서 직접 읽을 만화를 고르는 모습을 보며 ‘정작 만화는 어른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문화를 이끌고 나라를 움직이는 어른들이 총체적 문화의 산물인 ‘만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 ‘어른 만화’를 구상 중이다.
─. 끝으로 미래 화광신문에 바라는 점은.
지금 이 시대의 수많은 신문들 중에서 ‘화광신문’은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는 특별한 신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행복한 뉴스, 행복한 기사를 담아주길 바란다. 요즘 우리는 연일 터지는 사고와 불행한 뉴스로 가득한 신문을 구독료를 내고 받아보고 있다. 행복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든 신문을 고통을 느껴가면서 읽고 있는 것이 일면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화광신문’ 만큼은 정말 행복한 이야기,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희망의 신문’으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
─. 혹시나 해서 하나만 더 물어보겠다. 20년이 지났다.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오광포 지구부장으로 성장시켜 볼 계획은 없는가.
절대 없다. 20년이든 30년이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오광포’는 언제나 제일선의 회원들 곁에서 함께 웃고 응원하는 영원한 ‘반장’이다.
역시나. 그에겐 도통 가식이라는게 통하지 않는다. 지금도 화광신문 연재가 가장 어려운 도전이라는 김동화 화백. 만화라는 신선하고 무한한 세계를 통해 한국SGI가 펼쳐가는 인간주의의 향기를 전한다. ‘이 한 컷에 철학과 재미를’ 담기 위해 오늘도 그는 스탠드를 켠다.
김태헌(uncle@) | 화광신문 : 12/12/07 1000호 발췌
20여 년을 한결같이 우리 곁의 ‘오광포 반장’으로 살아 온 그에게 화광신문 연재 1000회의 감상을 들어본다.
창간 당시…
불법의 심원한 철학에 매료돼 순수하게 자신의 성장을 위해 입회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불법의 철학을 가장 쉽게 담는 만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었다.
─. ‘화광신문’이 지령 1000호를 맞이했다.
깜짝 놀랐다. 갑자기 장수무대에 불려나온 기분이랄까? 늘 원고 이메일을 받으며 호수를 세어 보기 때문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 요청을 받고 화들짝 놀라서 다시 헤아려 보았다. 주간신문으로서 ‘화광신문’의 20여 년 성장을 함께 참여해 온 날들을 돌아보며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 연재는 처음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1991년 화광신문의 전신인 ‘성교타임즈’ 창간 때 의뢰를 받았다. 당시 불과 몇 명밖에 없던 창간 멤버들의 연재 요청을 받은 기억이 난다. 재능기부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저 당연히 해야 한다는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 오광포 반장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엑스파일을 몇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나.
하하 좋다. 최선을 다해 대답하겠다.
─. 먼저 이름은 왜 ‘오광포’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가장 큰 화두는 역시 ‘광선유포(廣宣流布)’다. 그래서 쉽고 상징적인 이름으로 ‘광포’를 정했고. 여러 가지 감정의 의미를 담아 ‘오’라는 감탄사를 성으로 삼았다. ‘오! 광포!’ 같은 느낌?
─. 그럼 왜 ‘반장’인가.
생명과 생명이 만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가장 일선의 주인공은 반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반장이라는 사명이 참 좋다. 고난도 많지만 움직인 만큼 성장도 눈에 보이는 제일선 간부를 주인공으로 하고 싶었다.
─. 반장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 가족 소개도 부탁한다.
결혼 10년차 전후의 30대 중반 부부를 모델로 삼았다. 오광포 반장은 30대 중반, 부인은 30대 초반, 아들이 10세 전후, 딸이 7세 전후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족의 이름을 따로 생각해 놓지는 않았다.
─. 연령대에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느낀다. 청년과 중장년을 아우르는 세대로서, 안정적이기 보다는 부딪히고 성장하며 끊임없이 갖춰나가는 가장 활발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런 가족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 엑스파일 마지막 질문이다. 입회동기는.
하하 뭐라고 답해야 할까? 김동화한테 포교당해서? 당연히 창간과 함께 시작된 거지만 한 가지 선명하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창간 당시도 지금 만큼이나 포교 열기가 전국적으로 뜨거웠다. 그런데 병이나 경제고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입회한 분이 많았던 그때에도, 불법의 심원한 철학에 매료돼 순수하게 자신의 성장을 위해 입회하는 분들이 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불법의 철학을 가장 쉽게 담는 만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했었다.
─. 답변 감사하다. 1000회를 연재하면서 느끼는 감상은.
늘 배운다는 것이다. 원고를 검토하며 그때마다 새로운 흐름을 알게 되고 자신을 점검하게 된다.
─. 솔직히 지금쯤이면 소재만 봐도 감이 오지 않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솔직히 종교만화는 가장 어렵다. 만화의 맛이라는 것이 소재를 뒤집고, 꼬집고, 할퀴는(?) 반전의 미학인데 종교만화는 재미보다 계몽을 우선으로 할 수 밖에 없으니 한계선이 명확하다. 그렇다고 만화의 맛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재미있게 만들려면 매번 고민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되지-?’ 짧은 호흡안에 모든 승부를 걸어야 하는 4컷 만화와 만평은 만화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 ‘화광신문’ 연재는 영원한 도전이다.
─. 그렇다면 오광포 반장의 눈으로 바라본 화광신문의 변화를 한마디 부탁한다.
정말 눈부신 성장이다. 레이아웃도, 내용도, 부수도 사회적 위상도 놀랍다. 나는 근래 20여 년에 이룩한 대한민국의 초고도 성장이 화광신문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화광신문에 담긴 니치렌대성인과 이케다 SGI 회장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꿈과 희망을 열어 온 회원들, 그리고 그 소중한 성장이 모여 이룩한 한국SGI의 발전이 깔려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 화광신문의 성장과 함께 본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나.
신심을 하는 모든 분들이 성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로서도 청소년 만화의 오랜 시기를 접고 한국의 정서를 담은 작품들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고, 해외까지 인정을 받아 11개 나라에서 10여 권의 작품을 출간할 수 있었다. 덕분에 ‘빨간 자전거’가 ‘2006 프랑스 만화 비평 대상’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되는 등 다년간 많은 곳에서 수상과 격려를 받았다.
─.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만화계 발전에도 바빴던 것으로 안다. 최근엔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한국만화의 세계화를 위해서 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요즘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운영위원장으로 내 몫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직함으로 불리는 것이 싫다. 직함은 한국 만화의 발전을 위한 심부름일 뿐이지 나는 오직 ‘만화가’라는 이름이면 된다. 작품이 없는 작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그럼, 요즘 활동에 대해 부탁한다.
프랑스나 일본처럼 만화의 스펙트럼이 폭넓게 발전된 나라들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한번은 70대 노부부가 서점에서 직접 읽을 만화를 고르는 모습을 보며 ‘정작 만화는 어른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문화를 이끌고 나라를 움직이는 어른들이 총체적 문화의 산물인 ‘만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즘 ‘어른 만화’를 구상 중이다.
─. 끝으로 미래 화광신문에 바라는 점은.
지금 이 시대의 수많은 신문들 중에서 ‘화광신문’은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행복의 길을 가르쳐 주는 특별한 신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행복한 뉴스, 행복한 기사를 담아주길 바란다. 요즘 우리는 연일 터지는 사고와 불행한 뉴스로 가득한 신문을 구독료를 내고 받아보고 있다. 행복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든 신문을 고통을 느껴가면서 읽고 있는 것이 일면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 ‘화광신문’ 만큼은 정말 행복한 이야기,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희망의 신문’으로 성장해 주길 바란다.
─. 혹시나 해서 하나만 더 물어보겠다. 20년이 지났다.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오광포 지구부장으로 성장시켜 볼 계획은 없는가.
절대 없다. 20년이든 30년이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오광포’는 언제나 제일선의 회원들 곁에서 함께 웃고 응원하는 영원한 ‘반장’이다.
역시나. 그에겐 도통 가식이라는게 통하지 않는다. 지금도 화광신문 연재가 가장 어려운 도전이라는 김동화 화백. 만화라는 신선하고 무한한 세계를 통해 한국SGI가 펼쳐가는 인간주의의 향기를 전한다. ‘이 한 컷에 철학과 재미를’ 담기 위해 오늘도 그는 스탠드를 켠다.
김태헌(uncle@) | 화광신문 : 12/12/07 1000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