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회 총무간사·시인 채인숙 씨
사람들 가슴에 희망·행복·평화를 심는 전방위 문학인!
2007년 문예운동 신인상수상·2009년 ‘숨어있는 웃음’ 시 발표
신심·열정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문인의 길’ 간다
“웃어라
숨어 있는 미소도 웃음이려니
웃는 얼굴은
세상의 문을 환하게 열어 주는 것이다.”
- 시집 ‘숨어 있는 웃음’에서
늦깎이 시인 채인숙 씨를 만난 것은 무더위가 시작되던 여름날 오후. 채 씨의 구김살 없는 얼굴엔 자신의 시처럼 천만가지 미소가 숨어 있는 듯했다.
2003년 적지 않은 나이로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 문예 창작학과에 입학. 2007년 ‘문예운동’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채 씨는 2009년 시집 ‘숨어 있는 웃음’을 발표했다. 그리고 1년 뒤 그의 시집은 2010년 5월 24일자 ‘넥스트이코노미’ 잡지에 추천도서로 선정되었고, 재판을 인쇄하게 되었다.
이렇듯 지금은 어엿한 시인이지만 “내가 시를 쓰는 것은 살아가는 기쁨을 알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하는 채 씨의 모습에서, 그의 시 한 편 한 편마다 쉽지 않은 굴곡 속에서 이뤄온 삶의 희망이 오롯이 녹아 있음이 느껴졌다.
1971년 17세 채인숙 씨는 묘법을 처음 만났다. 꿈 많은 청춘시절이어야 할 시기였지만 가정형편의 어려움과 가족들의 병고, 거기에 자신의 병으로 학업마저 힘들었던 채 씨에게 신심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신심을 시작한 뒤 불가사의하게도 건강을 회복한 채 씨는 조직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광포 초창기였지만 가족의 반대 속에서도 순수하게 불법을 구도하며 도전했다. 그리고 1980년 당시 대학생이던 남편 차인호 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 무일푼으로 마련한 집이 날아갈 뻔 한 일,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남편이 명예퇴직 위기에 놓였던 일 등 갖가지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채 씨는 남편과 함께 일체를 기원으로 도전했다. 닥쳐오는 인생의 굽이굽이를 숙명전환의 마디로 전환하며 매일매일을 승리의 나날로 만들어 갔다.
지금은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사회와 학회에서 모두 활약하는 남편과 청년부로서 신심을 잊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자녀가 있다는 것이다. 채 씨가 늦은 나이에도 글을 쓰겠다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의 응원이라는 가장 큰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어려움을 신심으로 딛고 일어서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시절 ‘그래 내가 지금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길이야’라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그 마음을 잊지 않은 채인숙 씨는 조심스레 문화센터를 찾아 처음 글 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뜻 밖에 그곳에서 만난 교수의 추천을 받게 된 채 씨.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고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생애 처음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8년. 포기를 모르는 그녀 특유의 노력은 오늘의 ‘시인 채인숙’이 있기까지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게 걷게 된 문학의 길은 채 씨에게 또 다른 사명의 무대가 되었다.
학회활동과 문단활동을 병행하며 ‘SGI의 위상을 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노력하던 어느 날. 문단에서 만난 소설가 한 분을 좌담회에 모시게 되었는데 ‘이렇게 환희 찬 모임은 평생 처음 본다’며 기뻐했고, 지난해 열린 ‘SGI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특별사진전’을 관람하며 더욱 큰 감동을 받은 것이 기폭제가 되어 수많은 내외국인 인사를 사진전에 모시고 이케다 SGI 회장을 알리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중 인도에서 온 외국어대 라빈데르 교수는 소카대학교에서 강연을 세 번 한 적이 있다며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고 기뻐했고, 카란초한 교수는 히말라야 사진을 보더니 두 나무 사이에 본인의 별장이 있다며 무척 반가워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 시 문학계의 대선배이자 자신의 멘토인 김양식 한인(韓印)문화연구원장과 더불어 문단의 지인들과 관람했던 일은 소중한 추억이다.
이케다 SGI 회장의 우인이자 얼마 전 국내 유일의 인도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한 김 원장은 채 씨의 넘치는 에너지가 놀랍다고 평가한다.
“글 쓰는 거부터 아내 노릇, 엄마 노릇에다 봉사활동, 거기에 사람과 사람의 소중한 인연을 맺어주려고 애쓰는 모습까지 정말 열정이 넘쳐요. 앞으로 바란다면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와 풍부함이 담긴 작품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 시인으로 등장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옆에서 응원할 거예요.”
그런데 요즘 채 씨의 일상이 더욱 분주해졌다. 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회 총무간사를 맡으며, 국제펜클럽에도 입단하게 되면서 문인으로서 한국SGI와 문화계를 잇는 가교가 되겠다는 목표에 성큼 다가서게 된 것이다.
“좋은 문학은 사람의 마음을 넓힌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올린다”라는 이케다 SGI 회장의 말처럼 마음이 얼어붙은 이 철학부재의 시대에 사람들의 가슴에 평화를 가득 채워줄 글을 쓰고 싶다는 채인숙 씨.
“시인으로 등단을 했지만 하나의 장르에 머무르기 보다는 글의 세계를 넘나드는 전방위 문학인이 되고 싶어요. 행동으로 평화를 실천하는 위대한 스승의 제자로서 저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문인의 길을 걷겠습니다”라며 활짝 웃는 얼굴에 문학을 꿈꾸던 열일곱 소녀의 미소가 숨어 있다.
강남권 개포지부 총합부인부장
김태헌(uncle@hknews.co.kr) | 화광신문 : 11/08/19 937호 발췌
2007년 문예운동 신인상수상·2009년 ‘숨어있는 웃음’ 시 발표
신심·열정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문인의 길’ 간다
“웃어라
숨어 있는 미소도 웃음이려니
웃는 얼굴은
세상의 문을 환하게 열어 주는 것이다.”
- 시집 ‘숨어 있는 웃음’에서
늦깎이 시인 채인숙 씨를 만난 것은 무더위가 시작되던 여름날 오후. 채 씨의 구김살 없는 얼굴엔 자신의 시처럼 천만가지 미소가 숨어 있는 듯했다.
2003년 적지 않은 나이로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 문예 창작학과에 입학. 2007년 ‘문예운동’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채 씨는 2009년 시집 ‘숨어 있는 웃음’을 발표했다. 그리고 1년 뒤 그의 시집은 2010년 5월 24일자 ‘넥스트이코노미’ 잡지에 추천도서로 선정되었고, 재판을 인쇄하게 되었다.
이렇듯 지금은 어엿한 시인이지만 “내가 시를 쓰는 것은 살아가는 기쁨을 알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하는 채 씨의 모습에서, 그의 시 한 편 한 편마다 쉽지 않은 굴곡 속에서 이뤄온 삶의 희망이 오롯이 녹아 있음이 느껴졌다.
1971년 17세 채인숙 씨는 묘법을 처음 만났다. 꿈 많은 청춘시절이어야 할 시기였지만 가정형편의 어려움과 가족들의 병고, 거기에 자신의 병으로 학업마저 힘들었던 채 씨에게 신심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신심을 시작한 뒤 불가사의하게도 건강을 회복한 채 씨는 조직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광포 초창기였지만 가족의 반대 속에서도 순수하게 불법을 구도하며 도전했다. 그리고 1980년 당시 대학생이던 남편 차인호 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미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30여 년, 무일푼으로 마련한 집이 날아갈 뻔 한 일,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남편이 명예퇴직 위기에 놓였던 일 등 갖가지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채 씨는 남편과 함께 일체를 기원으로 도전했다. 닥쳐오는 인생의 굽이굽이를 숙명전환의 마디로 전환하며 매일매일을 승리의 나날로 만들어 갔다.
지금은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지만 무엇보다 기쁜 것은 사회와 학회에서 모두 활약하는 남편과 청년부로서 신심을 잊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두 자녀가 있다는 것이다. 채 씨가 늦은 나이에도 글을 쓰겠다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가족의 응원이라는 가장 큰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어려움을 신심으로 딛고 일어서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시절 ‘그래 내가 지금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건 글을 쓰는 길이야’라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그 마음을 잊지 않은 채인숙 씨는 조심스레 문화센터를 찾아 처음 글 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뜻 밖에 그곳에서 만난 교수의 추천을 받게 된 채 씨.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고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생애 처음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8년. 포기를 모르는 그녀 특유의 노력은 오늘의 ‘시인 채인숙’이 있기까지 가장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게 걷게 된 문학의 길은 채 씨에게 또 다른 사명의 무대가 되었다.
학회활동과 문단활동을 병행하며 ‘SGI의 위상을 알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노력하던 어느 날. 문단에서 만난 소설가 한 분을 좌담회에 모시게 되었는데 ‘이렇게 환희 찬 모임은 평생 처음 본다’며 기뻐했고, 지난해 열린 ‘SGI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특별사진전’을 관람하며 더욱 큰 감동을 받은 것이 기폭제가 되어 수많은 내외국인 인사를 사진전에 모시고 이케다 SGI 회장을 알리는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그 중 인도에서 온 외국어대 라빈데르 교수는 소카대학교에서 강연을 세 번 한 적이 있다며 뜻 깊은 시간이 되었다고 기뻐했고, 카란초한 교수는 히말라야 사진을 보더니 두 나무 사이에 본인의 별장이 있다며 무척 반가워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 시 문학계의 대선배이자 자신의 멘토인 김양식 한인(韓印)문화연구원장과 더불어 문단의 지인들과 관람했던 일은 소중한 추억이다.
이케다 SGI 회장의 우인이자 얼마 전 국내 유일의 인도박물관을 개관하기도 한 김 원장은 채 씨의 넘치는 에너지가 놀랍다고 평가한다.
“글 쓰는 거부터 아내 노릇, 엄마 노릇에다 봉사활동, 거기에 사람과 사람의 소중한 인연을 맺어주려고 애쓰는 모습까지 정말 열정이 넘쳐요. 앞으로 바란다면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와 풍부함이 담긴 작품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 시인으로 등장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옆에서 응원할 거예요.”
그런데 요즘 채 씨의 일상이 더욱 분주해졌다. 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회 총무간사를 맡으며, 국제펜클럽에도 입단하게 되면서 문인으로서 한국SGI와 문화계를 잇는 가교가 되겠다는 목표에 성큼 다가서게 된 것이다.
“좋은 문학은 사람의 마음을 넓힌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올린다”라는 이케다 SGI 회장의 말처럼 마음이 얼어붙은 이 철학부재의 시대에 사람들의 가슴에 평화를 가득 채워줄 글을 쓰고 싶다는 채인숙 씨.
“시인으로 등단을 했지만 하나의 장르에 머무르기 보다는 글의 세계를 넘나드는 전방위 문학인이 되고 싶어요. 행동으로 평화를 실천하는 위대한 스승의 제자로서 저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진정한 문인의 길을 걷겠습니다”라며 활짝 웃는 얼굴에 문학을 꿈꾸던 열일곱 소녀의 미소가 숨어 있다.
강남권 개포지부 총합부인부장
김태헌(uncle@hknews.co.kr) | 화광신문 : 11/08/19 937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