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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최병도 서예가
최병도 서예가 (종로권 종로지부 壯회원)
늦깎이 서예 입문 각종 대회서 입상! “서예에 푹 빠졌어요!”
묘법 금언대로 사는 인생이 참 된 삶! 부부 함께 끝까지 광포 인생 살 터

“敎他先察自身行(교타선찰자신행) 擇友且看事親誠(택우차간사친성).”

타인을 가르치려면 먼저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고, 벗을 선택하려면 그 어버이 섬기는 정성을 보라는 말이다.

붓글씨로 쓴 이 글귀는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쏙 들어왔다. 이 아름다운 글귀는 글쓴이의 반듯한 마음씨와 멋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의 집에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우국충정을 읊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시조도 만날 수 있다. 만인에게 일생성불(一生成佛)의 길을 일깨운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가르침도 마주할 수 있다. 여든을 바라보는 최병도(77)씨는 서예의 미덕을 말한다.

“좋은 글들을 붓글씨로 쓰다 보니 마음이 맑아지고, 글을 쓸 때 집중을 하니까 건강도 한결 좋아지는 것을 느껴요. 주위에서 젊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온화한 웃음을 띤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었다. 여전히 혈색이 좋고 허리가 꼿꼿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최근에는 서예에 취미를 붙이며 건강에 더욱 자신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뒤늦게 서예를 시작했다. 2003년 봄이었으니 72살 때였다. 어느 날 집에서 가까운 곳에 서예관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그도 그럴 것이 학창 시절에는 서예대회에 나갈 때마다 1등을 휩쓸 정도로 서예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50년간 놓았던 붓을 다시 잡은 셈이지요. 그런데 첫날 몇 번 써보니까 예전의 실력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어요. 좀더 노력하면 잘 쓸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는 그날 이후 틈틈이 집에서 붓글씨를 썼다. 처음에는 마음에 끌리는 추사체부터 배우다가 차츰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 등 여러 가지 서체를 하나하나 터득했다. 또 서예관에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있으면 체본(體本)을 얻어다가, 그것을 보고 쓰고 또 썼다.

늦은 출발이었지만 실력은 날로 좋아졌다. 주위에서는 서예대회에 작품을 내 보라며 성화였다. 그래서 붓을 다시 잡은 지 1년여 만인 2004년 전국노인서예대전에 참가했다. 결과는 한문부문 입선이었다. 2005년과 2006년에는 2년 연속 한국예술문화협회에서 주최하는 서예대회에서 입선을 차지했다. 또 해마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있고, 그곳에서 발간하는 작품집 ‘열혈노인’에 여러 차례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서예는 그에게 새로운 보람을 안겨줬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체본을 보고 연습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초보자들을 가르친다. 그는 “대체로 서예를 하는 사람들은 인품이 훌륭하고 사귈만한 사람들”이라며, 서예를 배우려는 열의가 있다면 누구에게나 가르쳐준단다.

또 다른 보람도 있다. 집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하나씩 건네는 것이다. 서예 작품은 다른 선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작품에는 좋은 가르침이 담겨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성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부인 박경순(80, 종로권 婦지도장)씨 덕분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아내의 말은 틀림없어요. 본존님께 기원하면 틀림없이 다 이뤄진다는 것을 배웠어요”라고 박씨를 극구 칭찬했다.

박씨도 이에 질세라 “회관에 오갈 때는 운전을 도맡아 해주고, 회합이 있으며 밥도 짓고 청소도 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광포 활동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무엇이라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남편이에요. 늘 고맙고 감사하지요”라고 말했다.

그와 박씨의 만남은 불가사의하다. 그가 박씨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무렵이다. 그때 재일교포였던 그는 친척집에 들리려고 한국에 왔는데, 갑자기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20대 청년은 눈물을 머금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군에 입대했다.

한국말을 할 수 없었기에 미군 부대에 배치를 받았다.

“미군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아내의 오빠를 만났어요. 그리고 일요일마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아내를 만나 한글도 배우고 친해지게 됐어요.”

그는 결혼과 함께 한국에 정착했다. 박씨에게서 한글을 배운 덕분에 군 제대 후에는 대학교에서 관리직 직원으로 5년간 일했다. 이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65살로 퇴직할 때까지 전국을 다니며 집을 지었다. 이어서 65살에 다시 한 학원에 들어가 74살까지 관리 업무를 맡아 열심히 일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건강하게 살면서 서예로 광선유포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장호정(hjjang@hknews.co.kr) | 화광신문 : 08/07/03 78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