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담
법화경에는 '모든 인간은 일체 차별 없이, 더없이 존귀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인류에게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김성희 (사)남북평화사업의료지원본부 공동대표
김성희 (사)남북평화사업의료지원본부 공동대표
(은평권 신사지부 婦지도원)
독립운동가 후예로 남북 평화 위해 진력
교육자・평화운동가로 남북 관계 개선 위해 활동
스승의 뜻 이어 입정안국정신 사회에서 실현할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8주년, 건국 60주년이 되는 중요한 올해를 맞이한 애국지사 후손인 김성희(65)씨는 남다른 마음이다.
“한국전쟁 당시 8살이었어요. 어린 시절, 처참한 광경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지 가슴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습니다.”
(사)남북평화사업의료지원본부(이하 평사원) 공동대표로 일하는 김성희씨는 지난 20년 동안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를 위해 다각적인 활동을 펼치며 현재 평사원뿐만 아니라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자문위원, (사)남북어머니평화합창단 지휘자 겸 단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대학에서 음악을, 대학원에서 남북문제를 전공하고 지난해 10월, 그는 ‘평화를 바라는 어머니의 소리가 널리 울려 퍼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 아래, 나라를 빼앗겼던 아픔과 전쟁의 비참함을 경험했던 어머니들이 모여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의 화음을 전하기 위해 ‘남북어머니평화합창단’을 창단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평사원에서는 극심한 기아로 고통 받거나 약이 없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해마다 의약품을 전달한다. 의료지원뿐만 아니라 학술 세미나도 열어 남북문제 해법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휴전선(DMZ)에 ‘한민족 평화병원 건립’ 사업도 추진 중이다.
김성희씨는 식민지 시절 항일운동을 하다 해방 후에는 중립화 통일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던 애국지사 김용중(1898~1975년) 선생의 외손녀다.
김성희씨의 남편인 故임익빈씨도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임씨의 친형인 임원빈(1923~1945년) 선생은 학생 신분으로 항일단체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고문으로 23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 독립투사로, 지난 3월 그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故김용중 선생도 애국지사로 활동한 공적이 높이 평가돼 200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올해로 한국SGI 입회 27년째인 김성희씨는 1981년 유치원 원장으로 교육계에 몸담았을 때, 어느 학부모를 통해 불법(佛法)을 만났다.
김씨는 불법의 생명존엄 철학과 이케다(池田) SGI 회장의 업적과 활동을 접하며 불법에 매료돼 곧바로 입회했다. 하지만 남편과 가족들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케다(池田) SGI 회장이 일본인이지만 ‘한국은 문화 대은의 나라’라며 한반도 평화를 호소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차례로 입회해 지금은 일가화락의 신심을 이뤘다.
1974년 유치원 설립 이후 지금까지 35년 동안 교육계에서 힘써온 그는, ‘남북한 동족간의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60여 년 동안 누명을 쓰셨던 외할아버지 김용중 선생이 올바르게 평가 받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미국 전역을 돌며 김용중 선생의 자료를 찾아 다녔다. 수십년간 수소문한 끝에 2000년 명예회복의 결실을 거두고, 지난 5월에는 그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성희씨는 “나는 죽어서라도 이 나라 전쟁을 막을 테니, 내 유골은 휴전선에 뿌려달라”라는 외할아버지 뜻을 이어 남북평화를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또 이케다 SGI 회장이 가장 바라는 일도 ‘평화’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나라에서 내가 스승의 뜻을 잇겠다”라는 신념으로 1992년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수업을 함께 듣는 사람들은 통일부에서 일하는 공직자나 정치가, 기자 등 현직에서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는 젊은 남성들이었다.
지식이 없는 정열은 빛이 없는 태양과 같다는 외국 속담처럼 ‘열정’ 하나로 대학원에 입학했으나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영어 원서로 남북관계를 공부하며 수업을 했다.
처음에는 너무 막막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이윽고 한 나라의 숙명전환도 성취하고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전환도 가능하게 한다”라는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는 그의 인생 지표가 돼 더욱 투지를 불태워 당당히 학생회장까지 맡아 맹활약하며, 영세중립통일협의회 공동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 활동을 위해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의 손이 평화를 향해 연결될 때 얼마나 아름다운 지구가 되겠는가’라는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가 있듯이 어머니들이 평화를 염원하는 멜로디가 이 지구상에 널리 울려퍼져 경색된 남북관계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을 나의 사명으로 하고 싶습니다. 독립운동가와 통일운동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내게 숙명적인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민족의 여성으로 스승께서 열어주신 광포제2막에 맞춰 묘음보살, 지용의 보살로서 남북평화를 제2의 인생목표로 가치창조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꽃 피우겠습니다.”
최법화(choibh@hknews.co.kr) | 화광신문 : 08/06/20 786호 발췌
김성희 (사)남북평화사업의료지원본부 공동대표
(은평권 신사지부 婦지도원)
독립운동가 후예로 남북 평화 위해 진력
교육자・평화운동가로 남북 관계 개선 위해 활동
스승의 뜻 이어 입정안국정신 사회에서 실현할터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8주년, 건국 60주년이 되는 중요한 올해를 맞이한 애국지사 후손인 김성희(65)씨는 남다른 마음이다.
“한국전쟁 당시 8살이었어요. 어린 시절, 처참한 광경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에 전쟁이 얼마나 비참한지 가슴에 사무치게 느끼고 있습니다.”
(사)남북평화사업의료지원본부(이하 평사원) 공동대표로 일하는 김성희씨는 지난 20년 동안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를 위해 다각적인 활동을 펼치며 현재 평사원뿐만 아니라 (사)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자문위원, (사)남북어머니평화합창단 지휘자 겸 단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한다.
대학에서 음악을, 대학원에서 남북문제를 전공하고 지난해 10월, 그는 ‘평화를 바라는 어머니의 소리가 널리 울려 퍼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 아래, 나라를 빼앗겼던 아픔과 전쟁의 비참함을 경험했던 어머니들이 모여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평화의 화음을 전하기 위해 ‘남북어머니평화합창단’을 창단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평사원에서는 극심한 기아로 고통 받거나 약이 없어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게 해마다 의약품을 전달한다. 의료지원뿐만 아니라 학술 세미나도 열어 남북문제 해법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휴전선(DMZ)에 ‘한민족 평화병원 건립’ 사업도 추진 중이다.
김성희씨는 식민지 시절 항일운동을 하다 해방 후에는 중립화 통일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던 애국지사 김용중(1898~1975년) 선생의 외손녀다.
김성희씨의 남편인 故임익빈씨도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임씨의 친형인 임원빈(1923~1945년) 선생은 학생 신분으로 항일단체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고문으로 23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 독립투사로, 지난 3월 그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故김용중 선생도 애국지사로 활동한 공적이 높이 평가돼 200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올해로 한국SGI 입회 27년째인 김성희씨는 1981년 유치원 원장으로 교육계에 몸담았을 때, 어느 학부모를 통해 불법(佛法)을 만났다.
김씨는 불법의 생명존엄 철학과 이케다(池田) SGI 회장의 업적과 활동을 접하며 불법에 매료돼 곧바로 입회했다. 하지만 남편과 가족들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이케다(池田) SGI 회장이 일본인이지만 ‘한국은 문화 대은의 나라’라며 한반도 평화를 호소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 진력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차례로 입회해 지금은 일가화락의 신심을 이뤘다.
1974년 유치원 설립 이후 지금까지 35년 동안 교육계에서 힘써온 그는, ‘남북한 동족간의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60여 년 동안 누명을 쓰셨던 외할아버지 김용중 선생이 올바르게 평가 받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미국 전역을 돌며 김용중 선생의 자료를 찾아 다녔다. 수십년간 수소문한 끝에 2000년 명예회복의 결실을 거두고, 지난 5월에는 그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성희씨는 “나는 죽어서라도 이 나라 전쟁을 막을 테니, 내 유골은 휴전선에 뿌려달라”라는 외할아버지 뜻을 이어 남북평화를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또 이케다 SGI 회장이 가장 바라는 일도 ‘평화’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나라에서 내가 스승의 뜻을 잇겠다”라는 신념으로 1992년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수업을 함께 듣는 사람들은 통일부에서 일하는 공직자나 정치가, 기자 등 현직에서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는 젊은 남성들이었다.
지식이 없는 정열은 빛이 없는 태양과 같다는 외국 속담처럼 ‘열정’ 하나로 대학원에 입학했으나 공부는 만만치 않았다. 영어 원서로 남북관계를 공부하며 수업을 했다.
처음에는 너무 막막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 사람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이윽고 한 나라의 숙명전환도 성취하고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전환도 가능하게 한다”라는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는 그의 인생 지표가 돼 더욱 투지를 불태워 당당히 학생회장까지 맡아 맹활약하며, 영세중립통일협의회 공동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 활동을 위해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어머니의 손이 평화를 향해 연결될 때 얼마나 아름다운 지구가 되겠는가’라는 이케다 SGI 회장 스피치가 있듯이 어머니들이 평화를 염원하는 멜로디가 이 지구상에 널리 울려퍼져 경색된 남북관계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을 나의 사명으로 하고 싶습니다. 독립운동가와 통일운동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내게 숙명적인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 민족의 여성으로 스승께서 열어주신 광포제2막에 맞춰 묘음보살, 지용의 보살로서 남북평화를 제2의 인생목표로 가치창조하며 아름다운 인생을 꽃 피우겠습니다.”
최법화(choibh@hknews.co.kr) | 화광신문 : 08/06/20 786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