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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교학

 

  • [일념삼천] - 성불을 나타내는 일념삼천

  • 관리자

  • 20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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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부성불’,’즉신성불’,’일생성불’을 나타내는 일념삼천

 

이 십계호구 법리의 안목은 구계의 중생의 생명에 불계가 갖춰져 있다는 것, 즉, 구계의 중생이 모두 평등하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있습니다. 불계를 갖추지 않은 구계도 없을 뿐더러 구계를 떠난 불계만의 부처도 없습니다.
범부’는 보통 사람을 뜻합니다. 십계호구라면 보통 사람의 몸에 부처의 경애를 열수 있습니다. 이것을 ‘범부즉극(凡夫卽極)’ 혹은 ‘범부즉불(凡夫卽佛)’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대성인은 “범부즉불이고 불즉범부이며”(어서 1446쪽)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불은 인간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부처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 세계와 동떨어져 어떤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범부의 몸 그대로 최고의 인간성을 열어 나타내는 것이 대성인의 성불관입니다. 이와 같은 성불을 ‘즉신성불’이라고 합니다. 즉신성불은 “몸 그대로 부처가 된다”라는 뜻으로, 중생이 구계의 범부 몸을 바꾸는 일 없이 부처의 경애를 얻을 수 있음을 말합니다.
법화경 이외의 경전에서도 ‘성불’을 설하긴 했지만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중생이 악인이었다면 선인으로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으며, 여성이었다면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습니다. 즉 악인이나 여성이 그 몸 그대로 성불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불도수행을 하여(역겁수행), 범부(구계)의 경애를 벗어나야 부처의 경애에 도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법화경 이외의 경전에서는 십계호구 즉 일념삼천의 법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구계와 불계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에 반해 법화경에서는 십계호구를 설함으로써 성불은 ‘부처라는 특별한 존재로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계의 몸에 ‘불계의 생명을 연다’는 의미라고 설했습니다.
어서에는 성불의 ‘성(成)’에 대해 “성(成)이란 연다는 의의이고”(어서 753쪽)라고 설해져 있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모든 부처를 부처로 만든 근원의 법이 바로 ‘남묘호렌게쿄’라고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근원의 법과 하나가 된 대성인 당신의 생명을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으로 도현하여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신수함으로써 누구나 스스로 생명에 불계를 용현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니치칸 상인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본존을 신수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한다면 우리의 몸이 즉 일념삼천의 본존, 연조(蓮祖) 성인이니라.” 어본존을 신수하고 광선유포의 실천과 신심을 관철한다면 범부의 몸 그대로 흉중에 대성인과 똑같은 부처의 생명을 용현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범부의 몸 그대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즉신성불’과 일생 동안에 성불할 수 있다는 ‘일생성불’은 모두 같은 법리를 표현한 말입니다.
 

▶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


이 즉신성불의 법리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 말이 ‘번뇌즉보리’ ‘생사즉열반’입니다.
소승교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범부는 번뇌(탐, 진, 치 등 심신을 괴롭히는 마음의 작용)를 단절해야 비로소 깨달음(보리)을 득하여 성불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번뇌는 어디까지나 생명 그 자체에 본래 갖춰져 있는 작용이며 번뇌를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현실의 생명활동을 중단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또, 권대승교에서는 일단 번뇌즉보리에 대해 설하고는 있지만, 구계를 떠나야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설하므로, 실질적으로보면 소승교와 같은 깨달음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소승교나 권대승교의 가르침대로 본다면 부처는 현실 세계의 존재와 사뭇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반해 법화경에서는 범부가 겪는 번뇌를 단절하는 일 없이 즉시 부처의 보리(깨달음)를 얻을 수 있다고 밝힙니다. 물론 번뇌즉보리는 고뇌나 미혹이 그대로 깨달음(보리)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의구전〉에 “번뇌의 장작을 태워서 보리의 혜화가 현전하니”(어서 710쪽)라고 있듯이, 고뇌에서 도피하지않고, 신심을 근본으로 번뇌에 정면대응해서 싸웠을 때, 번뇌가 연이 되어 깨달음의 지혜가 나타나 번뇌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생사즉열반은 어본존을 믿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생사로 인해 얻은 괴로움 때문에 고통스러운 생명 경애를, 깨달음을 통해 안온한 경애(열반)로 열어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며 번뇌즉보리와 더불어 즉신성불을 나타내는 법리입니다. 이 ‘번뇌즉보리’,‘생사즉열반’의 법리를 근본으로 했을 때 모든 고뇌를 자신의 성장과 행복의 인(因)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